[기자칼럼]취임식의 주인공들
[경향신문]
지난 20일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세계적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와 제니퍼 로페스의 노래, 심지어 바이든 본인의 취임선서도 아니었다. 대통령 취임식의 주인공은 23세의 흑인여성 시인 어맨다 고먼과 80세의 백인 남성 노정객 버니 샌더스였다.
검은 정장의 남성들 사이로 노란색 코트에 빨간 머리띠를 한 고먼이 단상에 오를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고먼은 ‘우리가 오르는 언덕’이라는 축시를 읽기 전 “대통령님, 바이든 박사님, 부통령님, 엠호프, 미국인 그리고 세계인 여러분”이라고 청자를 불렀다. ‘바이든 박사’는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을 뜻한다. 대학교수인 질 바이든은 남편의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계속 대학에서 가르치겠다고 밝혀 직업을 유지한 첫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작가 조지프 앱스타인은 월스트리트저널에 ‘박사로 사는 작은 즐거움은 잊고 대통령 부인의 삶을 즐겨라’라며 성차별적 시각을 드러냈지만, 고먼은 ‘박사’라고 부름으로써 질 바이든의 의사를 명백히 지지한 것이다.
고먼은 세심한 손짓을 섞어가며 축시를 낭송했다. “우리가 원한다면 새벽은 다가올 겁니다. 언제나 빛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볼 용기가 있다면. 우리가 빛이 될 용기가 있다면.” 고먼은 지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한 밤에 이 시를 완성했다고 한다. 고먼은 역대 최연소 축시 낭독자로 기록됐다.
샌더스 상원의원은 취임식에서 아무 일도 안 했지만 순식간에 전 세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점령했다. 취임식 구석자리에서 두툼한 등산 점퍼와 지지자가 선물한 손뜨개 장갑을 착용한 채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온라인의 합성사진용 ‘밈’이 된 것이다. 합성사진 속에서 샌더스는 코로나19로 관객이 없는 영화관에 앉아 있거나,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하다가 연행되는 젊은 날의 자신을 바라본다.
샌더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옷차림을 했다면 격식에 맞지 않다거나 무성의하다고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샌더스의 옷차림이 호평받은 것은 그의 삶과 정치 역정에 공명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난 샌더스는 1981년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 선거에 무소속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이력을 시작했다. 지난 40여년간 샌더스의 주장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라크전에 반대하다가 ‘매국노’로 몰렸고, 소수자의 편에 섰으며, 기후위기를 이야기했고, 월스트리트의 갑부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에 샌더스는 번번이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미끄러졌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민주당 주류의 타락을 막는 소금 역할을 했다. 샌더스의 옷차림에 대한 열광은 상원 예산위원장을 맡을 그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일 진보적 정책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미국이 강한 나라라면 그건 ‘바이든 보유국’이라서가 아니다. 트럼프의 황당한 명령에 불복한 관료들과 끝까지 저항한 언론이 있었기 때문이며, “노예의 후손이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깡마른 흑인 소녀” 고먼이 대통령이 되기를 꿈꾸기 때문이고, 다수 여론에 신경쓰지 않고 소신을 지킨 정치인이 있기 때문이다.
백승찬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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