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눈 속의 매미 소리
[경향신문]
펄, 펄, 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서 맴, 맴, 맴, 우는 매미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을 지닌 지가 여러 해다. 매미와 눈. 내리는 방향과 착지하는 자세가 너무 닮았다.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 근거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 같은 자리에서 피고 맺는 꽃과 열매도 서로 만나지는 못한다. 이 겨울의 가운데에서 땡볕의 매미 소리를 소환하는 것으로 냉기는 한결 가시고, 괜히 주눅 든 나의 어깨도 슬쩍 기지개를 켜며 냉랭한 마음 한 조각도 잠시 데울 수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 서른의 깔딱고개를 넘을 무렵이다. 고민은 쌓이고 미래는 막힌 굴뚝 같아서 응급처치라도 아니하면 하루도 건사하기 힘들어 해묵은 다이어리에 빽빽하게 글씨를 쓰던 날이 있었다. 주워들은 화두 붙잡는 흉내를 내며 오로지 한 글자를 무턱대고 썼다. 覺覺覺….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나면 흰 종이에 검은 매미들이 달라붙어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행여 기대했던 깨달음은 어디에도 없었고,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나처럼 울기조차 못하느냐? 혀를 차는 매미의 핀잔만 잔뜩 들어야 했다. 쯧쯧쯧….
그 어름으로부터 딱 그만큼의 날들이 또 통과했지만 하루의 앙금은 여전하다. 놓았다 들었다 해도 일은 오리무중이고 시간은 마구 졸아들어 이젠 앞날도 비상구만 해졌다. 미구에 내 몫의 저녁이 들이닥치고 깨닫지 못한 하루도 그 끝이 훤히 보일락 말락 하려는가. <논어>를 과감하되 독특하게 풀이한 이탁오의 <논어평>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을 만났다. 그것은 내 한심한 뒤통수를 때리기에 충분한 네 글자였다. 學者覺也(학자각야). 배우는 것은 곧 깨달음이다.
며칠 전 눈이 몹시 오던 날. 사무실 뒤편의 심학산에 올랐다. 배밭삼거리 층층나무 아래에 서서 공중에 휘날리는 눈송이를 무턱대고 맞았다. 지난여름 줄기를 붙들고 통곡하던 매미와 옛날 공책에 휘갈기던 覺覺覺 생각이 났다. 그 매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날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눈썹처럼 큼지막한 한 송이를 골라 질컥이는 땅으로 떨어져 녹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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