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자유투라는 의지, 승리라는 운명

입력 2021. 1. 25. 23:29 수정 2021. 1. 2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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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차의 승리. 연장전에서 이룩한 역전승. 하나원큐는 이길 자격이 있었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지루한 연패의 터널을 벗어났다. 연장전에서는 첫 골을 넣는 팀이 유리하다. 심리적인 선점 효과는 말할 수 없이 크다. 4쿼터 5분에 2점을 뒤졌다면 초조할 리 없다. 연장은 다르다. 금방이라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훈재 감독은 이토록 절박한 선수들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다행히도 선수들에게 “괜찮다. 한 골만 넣으면 따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초인적인 능력에 속한다. 누구나 “괜찮다.”고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 괜찮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이훈재 감독은 특별한 면이 있다. 농구대잔치 시절 비교적 작은 키로 골밑을 지켰다. 상대팀의 장신 선수를 잘 막아서 ‘보이지 않는 장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로 시대가 개막한 뒤에는 외국인선수를 수비했다. 그것도 단신 선수를! 이 능력이 그로 하여금 스타 선수가 즐비한 기아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신체적인 불리함을 ‘생각하는 농구’와 심장의 에너지로 상쇄했다. 나는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는 말을 극히 싫어한다. 너절한 레토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선수를 선택할 위치에 있다면 1㎝라도 큰 선수를 뽑을 것이다. 농구는 한 덩어리 엔진으로 굴러가는 전차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는 그 말을 반드시 써야 한다면 ‘선수 이훈재’에게 사용하겠다.

이기려는 의지는 경기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90점 안팎의 점수는 연장을 감안해도 여자 경기에서 적은 스코어가 아니다. 이런 다득점 경기는 양쪽 팀의 슛이 터져 줘야 가능하다. 삼성생명은 2점슛 50개 중 절반을, 3점슛 28개 가운데 10개를 성공시켰다. 하나원큐는 2점슛 40개 중 17개, 3점슛 24개 중 10개를 넣었다. 슈팅 게임에서 하나원큐는 64-80으로 크게 불리했다. 리바운드 경쟁에서도 31-37로 뒤졌다. 그러나 이 격차를 자유투 득점으로 메웠다. 하나원큐는 자유투를 통해 이기고자 하는 열망을 행동으로 옮겼다. 강이슬이 11개를, 양인영이 8개를, 강유림이 3개를 얻어 모두 넣었다. 28개 중 27개를 성공시킨, 팀 자유투 성공률 96.4%에 이르는 경기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박수를 보낸다. 아주 뜨겁게.

삼성생명도 이길 기회가 있었다. 승리자가 되었어도 자격을 의심할 수 없었다. 임근배 감독은 주전선수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전술과 선수 교체의 묘미를 보여주면서 승률을 지켜왔다. 지난 경기는 박하나와 김한별 없이 이겼다. 이날도 무려 11명을 교대로 기용하며 하나원큐의 독기 가득한 공세에 맞섰다. 정규시간 마지막 공격을 위해 교체 기용한 김보미는 동점 3점슛을 넣었다. 물론 행운이 따랐다. 우리나라 농구에서는 3점슛이 백보드를 맞고 들어가면 대체로 운이 따랐다고 본다. (백보드를 내편으로 만들어 탁구나 테니스의 라켓처럼 사용한 선수는 많지 않다. 이충희-김현준-허재 정도. 그 중에서도 김현준이 최고였다. 그는 전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아마추어 시절의 잠실체육관 백보드를 쥘부채처럼 요리해 무더기 득점을 했다.) 김보미의 슛이 운이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박빙의 승부에서 운도 실력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삼성생명은 3점을 졌지만 내용을 보면 1점차의 역전패다. 마지막 2점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울을 선택한 삼성생명이 지불해야 할 통과세였다. 마지막 실책 대신 역전골을 넣었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승부였다. 지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경기당 11.2점을 넣어온, 그러나 이날 4점에 그친 윤예빈이 한 골만 더 넣어 주었다면. 지난 경기 4쿼터에 전지전능한 승부 결정력을 보여준 배혜윤이 이 날은 실책을 5개 했다. 그리고 김단비가 넣지 못한 자유투 2개….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 결승선을 지나쳤다. 우리는 끝나버린 경기를 되짚으며 승부처를 찾아내고, 양지와 음지를 나눈 경계를 가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비록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늙어가는 관전자에게는 승부처라는 개념도 이따금 막연하게 느껴진다.

농구나 축구 같은 구기 종목에서 유난히 흐름을 강조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오름세’ ‘내림세’ ‘위기’와 ‘기회’ 같은 말로 경기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승부처에서 터진 3점슛’이나 ‘쐐기를 박는 2타점 적시타’라는 표현으로 순간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를 인생에 비유하고 싶어 한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골프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담았다.’고. 인간이 한 분야에 종사해 그 일을 업으로 삼을 때 삶의 애환이 담기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길모퉁이에서 무두질하는 장인(匠人)의 하루, 한 순간에도 인생의 비의가 깃들인다. 스포츠를 오래 취재한 나도 스포츠가 인생을 반영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방금 산에서 내려온 도사라도 되는 양 흐름을 말하지만 정작 승부는 (특히 비등한 팀끼리의 경기라면) 갑작스럽게 명암이 갈리기 일쑤다. 축구의 장거리포나 자책골, 야구의 홈런은 그런 승부를 가름하는 장치들이다.

농구는 득점이 많이 나오는 경기다. 결승 3점포라고 해도 60~70점에서 100점 이상까지 나오는 농구에서는 작은 부분일 뿐이다. 물론 2점차로 뒤진 팀에서 나온 3점슛은 값지다. 그러나 나는 1점차로 진 팀의 경기 기록을 다시 읽는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얻은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치지는 않았는가. 무인지경의 득점기회에서 림을 맞히지는 않았는가. 눈앞에서 놓친 리바운드 한 개는? 나는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얻은 자유투 2개의 값이 2점을 뒤진 가운데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 던지는 자유투의 값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기의 흐름’이나 ‘승부처’라는 말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다. 스포츠가 정말로 인생을 닮았다면, 한 순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 사진제공=용인 삼성생명 여자농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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