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모 행방불명돼야 출생신고 된다고요?" 미혼아빠는 웁니다
강원도에 사는 미혼부(未婚父) 정모(44)씨는 아들 A(6)군을 홀로 키운다. 2015년생인 아들은 지금껏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녀보지 못했다. 아파서 병원에 가도 건강보험 혜택 한번 받지 못했다.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서류상 ‘태어난 적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아들에게 “길 잃어버리면 파출소 가서 아빠 찾아 달라고 하라”는 말도 못 한다. 신원 조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도 못 해 손가락질당할까 봐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빠 혼자 아이 출생신고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생신고 위해 엄마까지 떠났지만…
정씨는 10여 년 전쯤, 가정 폭력을 피해 가출한 B씨를 만나 사실혼 관계로 동거를 시작해 아들 A군을 낳았다. 정씨는 출생신고를 위해 주민센터를 찾아갔지만 “혼인신고도 안 됐고, 친모가 전 남편과 관계를 정리하지 못해 출생신고가 불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B씨가 전 남편에게 “이혼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위자료 1억원을 주지 않으면 이혼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두 살 되던 해, B씨는 “내가 사라져야만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니 죄책감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언젠가는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갔다.
이듬해 정씨는 법원에 ‘미혼부 출생신고’를 신청했지만 기각당했다. “친모가 출산할 때 병원에서 받은 ‘출생증명서’에 엄마 이름, 등록 기준지, 주민등록번호가 남아 있다”는 이유였다. 정씨는 “친모가 어디 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법원이 찾아오라고 한다”며 “내가 아이를 포기하고 버린다는 게 아니라 맡아서 키우겠다는데도 못 하게 하는 건 국가가 아이를 학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인권위도 ‘출생 통보제 시급’
국가인권위원회는 22일 “출생 등록이 되지 못하면 보호자와 주변 사람들의 신체적·정신적·성적 학대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며 “출생 통보제 도입이 시급하다”는 내용의 위원장 성명을 냈다. 아동 출생 시 분만에 관여한 의료진이 출생 사실을 국가·공공 기관에 통보하자는 것이다. 지난 15일 인천에서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8세 딸을 살해한 친모가 구속된 지 일주일 만이다. 당시 친부는 딸의 출생신고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친모가 등록을 거부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친부는 딸이 숨지자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극단적 선택을 해 세상을 떠났다. 인권위는 “이 아동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공적으로 등록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학대 피해자”라며 “우리 사회에 출생 등록을 하지 못한 아동이 어느 정도인지 정부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미혼부는 현행법상 ‘아동 출생신고’가 쉽지 않다.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유롭게 출생신고할 수 있지만, 미혼부는 원칙적으로 신고 자격이 없다. 법원 허가를 통해 예외적으로 친부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2015년 소위 ‘사랑이법(가족관계등록법 57조)’이 신설됐지만 현실에선 어려움이 많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거쳐 친부임을 증명해도 ‘아이 어머니 이름이나 등록 기준지,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에만 법원의 확인을 거쳐 신고가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규정 때문이다.
◇출생신고 위해 엄마와 생이별까지
현장에선 ‘아이 출생신고’를 위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멀쩡한 친모와 연락을 끊으며 생이별을 하는 경우도 많다. 친모가 휴대전화를 없애고 몇 달간 잠적하는 방법으로 ‘아이가 사실상 고아가 됐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김지환 한국미혼부가정지원협회 대표는 “연락을 끊은 척하면 가정법원에 대한 소송 사기가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정말 연락을 끊으라고 조언하는데, 아이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면 큰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사랑이법 적용이 안 되면 아이는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아이가 소송을 할 수 없으니, 친부가 대리인을 맡아 성본(姓本)과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소송, 인지(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청구 소송을 거쳐야 한다. 친부가 대리인이 되기 위해 이 3번 모두 ‘특별 대리인’ 선임 소송을 별도로 해야 한다. 소송을 총 6번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법이 신설된 2015년 5월부터 작년 12월까지, 5년여간 미혼부의 출생신고는 총 664건 접수됐다. 이 중 20%(138건)는 법의 높은 기준을 넘지 못하고 기각됐다. 김지환 대표는 “출생신고를 하려는 미혼부 전화가 한 달에 많게는 10건까지 오는데, 복잡한 등록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에 연락하겠다’며 더 이상 연락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학대당해도, 숨져도 발견 못 해
출생신고를 못 한 아이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다. 공혜정 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으면 구청 등의 관리 대상에서 벗어나고 아동 학대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작년 6월 가족관계등록법의 ‘혼인 외 출생자의 신고는 모(母)가 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부(父) 또는 모(母)가 하여야 한다’로 바꾸자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훈태 변호사는 “친모만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한 법은 유전자 검사가 발달하기 전에 만든 것”이라며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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