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글이 되는 음악] 대중음악사 재구성 다큐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 K'
‘오래전 그날’ ‘입영 열차 안에서’ ‘숙녀에게’ 등 1990년대 히트 발라드의 작사를 책임졌던 박주연이 창작의 뒷이야기를 밝혔다. 오랫동안 써왔던 일기에서 소재를 찾고, 펜으로 한 줄 한 줄 쓰고 지워가며 가사를 완성했다는, 묵은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그 노래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걸어와 지금의 심장을 다시 두드렸다. 이제는 작곡가보다는 예능인으로 더 많이 인식되는 주영훈, 철이와 미애로 기억되는 신철은 1990년대 나이트클럽과 DJ들이 어떻게 가요계를 바꿔 놨는지 되짚었다. 모두가 알던 노래들, 하지만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노래들이 생동하는 대중문화사로 살아났다. 1월 3일부터 SBS에서 방송되고 있는 SBS 다큐음악쇼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 K(이하 아카이브 K)’ 얘기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열심히 본 장르는 음악 다큐멘터리다. 위대한 음악가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부터 음악의 역사를 조명하는 작품, 음악 탄생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시리즈 등 음악과 다큐멘터리가 만나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화수분 같았다. 이런 다양한 다큐멘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명도를 막론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들려줄 수 있는 뮤지션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와 치부를 드러내도 진지하게 다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간과 장르를 막론하고 풍성한 아카이브와 데이터가 쌓였기 때문이다. 즉, 방대한 1차 사료가 존재하기에 이를 토대로 한 2차 사료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2차 사료를 ‘콘텐츠’라는 단어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 이런 작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 범위가 특정한 아티스트에게 집중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가볍게 소모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깊이만 추구하다가 위인전이 되거나, 재미에 매몰되어 흔한 예능에 머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들을 데려다 놓고 추억팔이만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빌보드 1위 가수를 배출하는 한국 대중음악에 정작 그 역사의 아카이브는 없었다. 일회성 가십과 관심만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아카이브 K’는 주목할 만한 시도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인터뷰이로 참여했다. 흔한 ‘방송용 인터뷰’로 생각하고 갔다가 놀랐다. 두 시간 가까이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프로그램을 만든 제작사에 합류하게 됐다. 그때도 반신반의했다. ‘방송 관행’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프로그램이 시작된 후, 한 명의 비평가로서 ‘아카이브 K’를 소개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발라드를 다룬 1편과 2편에서는 메인 MC인 성시경을 필두로 김종국, 백지영, 이수영, 임창정, 조성모 등이 스튜디오에 모여 그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들의 인기곡을 어떻게 불렀는지, 어떤 계기로 데뷔하게 됐는지, 어떤 이들의 도움으로 커리어를 함께할 수 있었는지. ‘연예면’이 아니라 ‘문화면’에 실릴 내용이었다. 지금껏 방송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이기에 ‘라디오 스타’류의 예능으로 흐를 수 있었지만 ‘아카이브 K’는 토크의 방향키를 돌리지 않았다. 따라서 출연진은 ‘연예인’이 아니라 ‘가수’이자 ‘음악인’으로 TV에 머물렀다. 이런 기조는 댄스를 다룬 3편과 4편에도 이어졌다.
나는 생각한다. 1990년대야말로 한국 음악에서 댄스 뮤직이 가장 조명받지 못한 시대였다고. 이는 평론가로서의 반성이기도 하다. ‘판 찍어서 10만 장 못 팔면 회사 접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던, 음반 시장의 최고 전성시대였다. 1980년대까지의 한국 대중음악과는 현저히 다른 사운드와 리듬을 들려줬던 시대였다. 대중문화의 주도권이 10대와 20대로 완전히 넘어갔던 때였다. 아이돌로 음악 시장의 패러다임이 넘어가기 직전이었기에 ‘스타’와 ‘노래’가 공존했다. 즉, 가수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히트곡이 있어야 했다. 그것도 팬덤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다 아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쿵따리 샤바라’ ‘여름 이야기’ ‘트위스트 킹’ ‘날개 잃은 천사’ 같은 노래가 그렇다.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였지만 그 많은 춤꾼과 프로듀서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어떻게 음악을 만들었는지는 지금껏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조명받지 못한 90년대 댄스 음악까지 다룬 고품격 다큐멘터리
방송뿐 아니라 비평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100대 명반’류의 작업에서 1990년대 댄스 음악은 단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그 화려했던 시기의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카이브 K’는 체계적으로 조명했다. 나이트클럽 DJ가 가수가 되고, 프로듀서와 제작자가 되어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드러났다. 거리의 춤꾼들이 이태원의 미군 전용 클럽 ‘문나이트’에 모여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제작자들에 의해 발탁되어 한순간에 스타가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 시대를 즐겼던 이들에게는 청춘의 재발굴이요, 아이돌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영화 같은 스토리였을 것이다.
이 힘에 방점을 찍는 건 중간중간 삽입되는 미니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다. 자료화면, 동료 음악가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왜 유재하의 음악이 특별했는지, 박주연의 가사가 왜 그렇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왜 댄스 음악의 사운드는 그 전과 달랐는지, 왜 이태원으로 춤꾼들이 모여들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이 영상을 본 출연자들은 현장에서 주석 같은 한 마디씩을 덧붙이고 주제와 관련된 노래를 부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출연 가수의 무대뿐만 아니라 규현, 폴 킴 같은 동시대 음악인들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오래전 그날’을 지금의 어법으로 소화한다. 이로 인해 아카이빙이라는 딱딱한 형식은 스튜디오 토크쇼와 음악 예능의 겉옷을 자연스럽게 걸친다. 추억이라는 과거와 헌정이라는 현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총 10회 분량으로 방영되는 ‘아카이브 K’는 앞으로 홍대 인디 음악계의 역사, 김민기의 학전소극장, 동아기획, 그리고 K팝의 해외 진출사를 다룬다. 발라드와 댄스를 통해 인기의 절정을 찍었던 이들을 먼저 보여준 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놓쳐선 안 될 주제들을 선보인다.
만사가 그렇듯, 아쉬움은 남는다. 뭘 다뤄서가 아니라, 안 다뤄서다. 누가 나와서가 아니라, 안 나와서다. 하지만 200여 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10부작 프로그램으로 모든 것과 모든 이를 다룰 수 있다면, 이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아카이브 K’는 그 자체로 완결이 아니라 우리가 진작 했어야 할 숙제와 같다. 또 하나의 시즌이건, 또 다른 프로그램이건 간에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포괄적 아카이빙이라는 숙제가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작업이야말로 우리 음악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끊기지 않는 다리를 놓는 첫 공정이자, 미래로의 길을 잇는 초석이 될 것이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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