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42] 타인의 삶 |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공존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누군가는 손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데도 달처럼 멀고, 어떤 이는 별처럼 떨어져 있는데도 마음을 밝혀주며 생의 길잡이가 된다. 밉게 군다고 꼭 미운 것도 아니고 예쁘게 생겼다고 반드시 고운 사람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무엇일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 비즐러는 정보기관 슈타지의 비밀 요원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지키는 창과 방패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반역자를 색출해내기 위해서라면 용의자를 협박하고 괴롭히고 잠도 재우지 않는 냉혈한이다. 그에게 어느 날, 극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드라이만은 권력의 실세인 햄프 장관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탐내고 있던 배우 크리스타의 연인이던 드라이만이 연출가 예르스카에 대한 처벌이 가혹하다며 활동 재개를 부탁하자 장관이 그를 감시하고 숙청할 증거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첫눈에 드라이만이 사회주의의 적인 걸 알아보았던 비즐러는 직속상관 그루비츠의 명령을 받고 아파트가 비어 있는 시간, 도청 장치와 카메라를 설치한 뒤 같은 건물 위층에서 24시간 감시 업무를 시작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드라이만은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드라이만은 서방의 책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이 허락될 만큼 국가의 신임을 받는 성공한 작가였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그를 목마르게 했다. 더구나 크리스타가 배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햄프 장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의 불안은 커진다. 활동을 금지당했던 예르스카가 절망 끝에 자살하자 조국에 대한 실망은 더 깊어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건 끌림의 강도다. 일정한 거리와 동등한 힘이 유지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큰 자석이 작은 자석과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한쪽은 끌어들이고 다른 한쪽은 끌려간다. 끌려가는 사람은 상대의 열정이나 신념에 영향받아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보면 자석과 쇠붙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잃어버리고 타인의 삶에 흡수되기도 한다.
드라이만의 일상을 감시하던 비즐러는 언제부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가 읽던 시집을 몰래 가져와 읽고 비탄에 빠진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당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출가의 연출을 금지하는 나라,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우로 무대에 설 수 없는 국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거짓 충성을 맹세하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배신해야 하는 사회, 권력자의 욕망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드라이만은 철의 장벽에 갇혀 있는 동독의 실상을 폭로하는 칼럼을 서독에서 익명으로 발표하기로 한다. 자신은 감시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드라이만은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원고 내용과 국경 반출 방법을 계획하고 서체를 추적할 수 없는 소형 타자기도 입수한다.
멀리서 봤을 때 무엇 하나 아쉬운 것 없어 보였던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지켜보던 비즐러는 어떤 슬픔의 조각들을, 동시에 자신에게도 있는 줄 몰랐던 삶의 쓸쓸함과 외로움의 그림자를 직면하게 된다.
사회 정의를 위해 봉사한다고 믿었던 자긍심은 부조리한 이 나라를 견디기 위한 자기 합리화는 아니었을까? 그는 애써 외면하려 했던 굴욕감을, 생의 비루함을 응시한다. 그 끝에 남겨진 건 그가 처음으로 안아보는 삶에 대한 애틋함이었을 것이다. 비즐러는 개미를 관찰하는 착한 아이처럼, 그들의 위태로운 삶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는 드라이만의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다.
한편, 크리스타는 햄프 장관의 계속되는 요구를 거절하기로 했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서독에서 발표된 글이 드라이만 것이라 확신한 장관이 그루비츠를 시켜 크리스타를 약물복용 혐의로 잡아들이게 한 것이다. ‘애인의 죄를 증명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사회에서 매장되리라!’ 이보다 더 무서운 협박이 어디 있을까?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던 그녀는 타자기가 숨겨진 장소를 자백하고 만다. 여자에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어 체포하고 그녀 연인까지 파멸시키려는 권력자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시키는 짓은 무엇이든 하는 그루비츠를 보며 비즐러는 환멸을 느낀다.
비즐러는 모든 경력과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나간다. 가택 수색대원들보다 먼저 드라이만의 집에 도착하기 위해,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드라이만의 타자기를 숨겨 나오기 위해.
세월이 흐르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드라이만은 우연히 만난 전직 장관 햄프를 통해 동독 시절, 자신도 철저히 감시당했음을 알고 놀란다. 그렇다면 왜 원고 반출 혐의로 체포되지 않았던 것일까? 슈타지 기록 보관소에 찾아가 자신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감시 기록을 열람하던 드라이만은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보고서를 보게 된다. ‘HGW XX/7’이란 암호명을 가진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왜, 무엇을 위해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지켜주었던 것일까?
마지막 대사 한 마디를 위한 영화
지난해 나치 시대를 살았던 한 예술가의 고뇌를 담은 ‘작가 미상’을 발표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이 2006년에 내놓았던 독일 영화다. 어두운 밤, 작은 돌멩이 하나를 호수에 던진 후 잔잔하게 파장을 키워가는 이 작품은 “아니오, 그건 날 위한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비즐러의 마지막 한 마디를 위해 존재하는 영화다.
그 짧고 강렬한 마지막 대사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오래도록 가슴을 휘젓는다.
내가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는 건 저만큼 떨어진 곳에 타인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저만치에서 살아가는 이유도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인력으로 밀고 당기는 지구와 달처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살아가다가 아주 가끔 월식처럼 타인의 삶을 끌어안을 때도 있지만 잠시 스쳤을 뿐,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또다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는 관계.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게 아닐까? 멀고도 가까운 달처럼, 그보다 더 먼 데서 빛나는 별처럼,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마주 보고 다가서고, 돌고 스치고 교차하며 이 세계에서 공존하는 방식이란.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