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를 네가 알렸다?" 3주째 증거제시 않는 이란

범기영 2021. 1. 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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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적 석유 화학제품 운반선 한국케미호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된 지 오늘로 3주가 됐습니다. 한국과 이란의 공식적인 억류 해제 교섭은 진전 없이 원점을 맴돌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언제쯤 가족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 “이란 현지에서 사법 절차 시작”

현지에선 새로운 움직임이 포착되긴 합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금요일(22일), 선박에 이란 당국자들이 승선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이란 당국 차원의 공식 움직임은 억류 이후 처음입니다.

선박이나 선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가 현지에서 시작됐느냐는 KBS의 질의에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주 후반에 이란 당국자들이 승선했고, 사법 절차가 시작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란 쪽에서는 이번 억류 사태가 한국케미호의 해양 오염 혐의에 대한 사법 절차일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습니다.

해양오염에 대한 구체적 증거가 제시되어야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든, 억울하다면 부인하며 다투든 할 텐데요. 이란 당국에서는 사법 절차를 개시하고도, 이렇다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 “사법 절차라기보다는 입항 절차”

이란 당국의 승선을 놓고 선사 측의 해석은 약간 다릅니다. 이란 측에서 한국케미호에 승선한 것은 맞지만, 통상적인 입항 절차였다는 겁니다. 선사는 이같은 사실을 한국인 선장과 전화통화로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선사 관계자는 “그동안 한국케미 호는 반다르 아바스 항에 입항하지 않고 앞바다에 정박한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입항하려면 세계 어느 항구든 출입국, 관세, 검역 세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냥 닻만 내린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지난 금요일에 출입국과 검역 업무 공무원들이 승선해서 입항 절차를 밟았다는 설명입니다.

한국케미호의 한국인 선원 한 명이 복통을 호소해 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바 있는데, 이는 엄밀하게는 불법 상륙이던 겁니다. 출입국 절차 없는 상륙이었으니까요. 그 상태를 방치하던 이란 당국이 뒤늦게 입항 수속을 진행했다는 게 선사 측 설명입니다.

단순 입항 수속이라 해도, 향후 사법 절차를 본격화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 대답 없는 이란…“외교로 풀어야”

선사는 현지에 대리인을 지정해서 이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고 밝혔습니다. 선사 관계자는 “P&I(선주상호보험) 사람이 수십 차례 공문을 보내고 문의를 하고 있지만, 응답이 전혀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정말로 오염 사고가 맞고, 이란이 형사 사법 절차를 밟는다면 변호사를 선임해서 조력을 받아야 할 텐데요. 선사 관계자는 이란 현지에서는 변호사를 구할 수조차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오염사고도 사법 절차도 아니다. 외교적으로 풀 문제일 뿐이다.”

그나마 선원들의 신변에 이상이 없고, 이란이 위해를 가할 의도를 보이지도 않는 점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 결국 열쇠는 동결 자금…언제 녹일까?

한국과 이란 정부 모두 공식적으로는 연관 관계를 부인하지만, 결국 이번 억류 사태는 한국 내 동결된 이란 자금 관련 불만 때문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갈수록 커집니다. 국내 은행에는 7조 원 넘는 이란 석유 대금이 묶여 있는데 이 돈을 쓸 수 있게 해달라는 건 선박 나포 이전부터 이란의 오랜 요구입니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1일 테헤란에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과 회담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란이 내지 못한 유엔 회비를 이 자금으로 내거나 코로나19 진단키트와 의약품을 구입하도록 하는 방안 등은 “기술적인 부분이어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남습니다. 하나는 자금 규모입니다. 동결된 자금은 7조 원이 넘는데 비해 현재 거론되는 용처는 상대적으로 소액입니다. 이란이 밀린 유엔 회비는 180억 원가량으로 추산됩니다. 이란 입장에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느낌일 수 있습니다.

■ 미국 정권 교체기, 흘러가는 시간

다른 하나는 미국입니다. 이란 자금이 묶인 건 미국이 이란과의 핵 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대이란 제재를 부활시킨 탓입니다. 세컨더리 보이콧(제재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은행, 정부 등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는 방안) 우려로 이란 자금을 한국이 임의로 풀어줄 수 없고 결국 미국과 논의가 필수입니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 우리 외교부에 해당하는 국무부 장관은 아직 의회 인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으로서는 이란 자금 문제를 논의할 상대가 없는 셈입니다. 미국 국무부 라인이 정돈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서 억류 장기화 우려도 커집니다.

다만 외교부 당국자는 꼭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무부 장관이나 부장관 후보자가 모두 이란 핵 협상 경험이 있고 이란 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준만 받으면 빠른 속도로 협의가 진행될 수 있다.”

억류 선원 가족과 선사는 국가만, 외교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국가의 존재 목적은 결국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거니까요. 마침 지난주 발효된 영사조력법은 “국가는 영사조력을 통해 사건ㆍ사고로부터 재외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범기영 기자 (bum71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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