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은 꿈꿨다, 가족과 자연 속 평화로운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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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색 연미복 차림의 신사가 노란 들녘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자화상은 코미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을 쏙 빼닮았다.
극한의 고통을 잊고 사랑하는 가족과 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그는 어색한 연미복 신사가 자연을 활보하는 구도로 표현했던 셈이다.
장 작가의 자화상은 지난 13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30주기 기념전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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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색 연미복 차림의 신사가 노란 들녘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자화상은 코미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을 쏙 빼닮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유명한 경구가 실감 난다. 채플린이 우스꽝스럽게 연기했던 연미복 신사의 몰골과 몸짓을 하고 있지만, 눈에 박히는 것은 창백한 얼굴이다. 그는 우울하고 불안한 낯빛으로 그저 망연자실 앞을 바라볼 뿐이다.
20세기 이후 한국 근현대 자화상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꼭 꼽히는 장욱진(1918~1990)의 <자화상>은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그렸다. 두 아이를 고향인 충남 연기군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부인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풍성한 누런 논밭과 그 위에 한가로이 날아 내려오는 새 네 마리, 조각 같은 구름은 사실 현실과는 정반대의 풍경이다. 실제로는 널브러진 주검과 폭격기의 기총소사, 작렬하는 포탄으로 파인 구덩이가 있었을 따름이다. 극한의 고통을 잊고 사랑하는 가족과 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그는 어색한 연미복 신사가 자연을 활보하는 구도로 표현했던 셈이다.
장 작가의 자화상은 지난 13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30주기 기념전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전에 나왔다. 확대된 이미지가 떠돌아다녀 꽤 큰 그림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가로 10.8cm×세로 14.8cm 엽서 크기의 작은 그림이다. 종이에 싸구려 물감으로 그려 보존 상태도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불안하고 스산한 내면이 지극히 평화롭고 해학적인 풍경과 몸짓 속에 절묘하게 어울려 역설적으로 전쟁의 고통이 당대 예술인에게 얼마나 핍진하게 다가왔는지 증언한다. 전시는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이자 주제인 ‘집’, ‘가족’, ‘자연’을 테마로 삼고, 대표작 50여점을 추려 관객 앞에 내놓았다. 초창기 두꺼운 질감의 전형적인 근대 풍경 유화부터 자연, 우주, 가족, 집의 도상을 중심으로 선승의 선화나 수묵화 느낌이 우러나는 말년 작품까지 다채로운 수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의 자화상을 필두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가족도의 도상과 20세기 초 스위스 거장 파울 클레의 기하학적 인물화와 비슷해 주목을 받았던 1957년작 <얼굴> 등 기하추상적 작업이 전시 초반부를 수놓는다. 중반 이후엔 엄정한 건축적 구도 아래 좌우 대칭의 구성미를 보여주는 나무와 집으로 채워진 단순화한 풍경이 잇따라 펼쳐진다. 1990년 타계 직전 그린 <밤과 노인>은 첫머리의 자화상과 절묘한 조응을 이루는 마지막 작품이다. 밤하늘에 반달과 같이 떠 있는 노인네와 그 아래 지상의 산길을 머뭇거리듯 걸어가는 아이의 대비되는 모습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작가의 원숙하고 깊은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코로나 방역 탓에 현대화랑 누리집을 통한 사전 온라인 예매로만 전시를 볼 수 있다. 2월28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현대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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