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식 하이퍼 인플레 일어날수도"..국채 매입 압박에 전문가 경고

세종=이민아 기자 2021. 1. 2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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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兆 손실보전법 논란]
"돈 찍어 자영업자 지원하자" 논리
전문가들 "마이너스 성장 국가인 일본 따라갈 필요 없어"
"물가 치솟을 것...베네수엘라 따라갈 우려"

자영업자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입은 손실을 국가가 보상해주는 ‘손실보상제’ 재원을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매입해 마련하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부족한 재정을 뒷받침해 자영업자를 지원해주자는 주장이다.

거시경제·통화정책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논의에 대해 "국채 직매입은 부채를 화폐화하는 방안으로, 돈을 찍어서 주자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시장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금융 지원으로 아직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인데 엉뚱한 논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5일 정치권과 관가에 따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영업자 손실보상제 재원을 국채 발행 후 한국은행이 직접 인수해 마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소상공인·소기업이 손실 보상 대상이고, 집합금지업종은 매출 손실액의 70%, 집합제한업종은 60%, 일반업종은 50%를 보상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설명회 겸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논란의 ‘국채 직매입’, 전례 단 한번 뿐

민병덕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극복을 위한 손실보상 및 상생에 관한 특별법안’에 따르면 "국가는 손실보상금 및 위로금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발행한 국채는 한국은행이 매입하며, 매입 금액은 정부 이관 후 소상공인 및 국민에게 지급한다"고 적혀 있다.

민 의원 법안이 통화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이 법안이 한은의 국채 직접 인수(직매입)을 염두에 둔 법안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영업자의 손실을 보상해주는 용도로 발행하는 국채를 한은에 바로 넘기는 것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국채를 한은이 단순매입하는 공개 시장 운영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단순 매입은 국채 금리 급등 등 채권 시장에 불안 요인이 발생할 경우, 한은이 시장 안정 수단으로 활용하던 공개 시장 조작의 일환이므로 금통위 의결이 필요없다.

공개 시장 운영 방식과 달리 국채 직매입은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이 곧장 정부 금고로 가는 방식이다. 일본이 2000년대 초반 가장 먼저 시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 등이 시행했지만, 비기축통화국에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다. ‘부채를 화폐화한다’라는 논란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한은법 75조에 의거해 지난 1994년 12월부터 1995년 2월까지 양곡관리기금이 발행한 양곡증권 1조1000억원어치를 사들인 적은 있다. 이는 당시 양곡관리기금 적자를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감안하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국채 직매입은 그동안 한번도 없었던 셈이다.

◇전문가들 "기축통화 없는 韓, 국채 수요가 일본보다 낮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본식 국채 직매입 모델’을 따라가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고 두가지 이유에서 우려한다. 우선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일본 국채에 대한 해외 수요가 한국 국채보다 많다. 또 일본은 오랜 기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어 금융 정책 상의 완화가 더 이상 어려워 국채 직매입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경제성장률이 2%대인데다 금융 자원이 아직 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채 직매입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어도 재원을 조달해 현재의 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채 직매입은 무책임한 방법이다. 기축 통화국의 경우, 국채를 많이 발행해도 수요가 많아 감당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면서 "한국 국채의 이자율이 높아질 것이고, 리스크가 올라가고, 국가 신인도 하락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채 직매입으로 발생할 불안 요소를 감안하면 국채 직접 인수보다 간접 인수가 나을 것"이라면서 "현재 부동산과 주식 등에 몰린 자산이 어마어마한 규모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금융 자원이 있다는 이야기"라고 분석했다. 이런 여력을 활용한 금융 정책을 설계해서 어려움을 겪는 계층에 핀셋 지원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시내 모습. /AP·연합뉴스

◇남미 국가들 ‘하이퍼 인플레이션’ 따라갈 위험도

전문가들은 또 남미 국가들의 하이퍼 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 급등) 위험이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의 재정 여력이 남미 국가에 비해 월등하지만, 정치권 요구대로 100조원 이상의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은이 직매입할 경우 통화량이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와 물가 상승 역시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은 막대한 액수의 국채를 찍어 중앙은행이 매입하게 하는 ‘부채의 화폐화’ 방식을 자주 채택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됐다. 통화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면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절하되면서 외화자금유출로 이어지고, 국가신인도에 타격을 받으면서 지난 1997~1998년 외환 위기 때와 비슷한 충격이 올 수 도 있다.

감당하기 어렵게 치솟은 국가채무비율도 문제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빠르게 치솟아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47% 수준인데, 고령화 요인과 연금 부담 등을 더하면 ‘부채 감내력’이 임계치에 달했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빚을 더 낼 여력이 없는데 국채를 발행해 손실을 보상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빚 잔치’가 될 것이란 관측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가 부채를 활용할 수 있는 여력은 몇 년 안 남았는데, 공공기관 부채까지 더하면 이미 (부채가) GDP에 근접한 수준이기 때문"이라면서 "국가가 손실을 보상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빚을 내서 지원해서는 안 된다. 배달 등으로 이익이 늘어난 점포도 많은데, 이를 골라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대출의 형태, 즉 기존의 금융 지원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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