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와 정부가 결심하면 임금 평준화 가능하다

정이환 2021. 1. 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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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노조는 '임금 평준화'로 목표를 재설정하고, 연공급을 직무급이나 숙련급으로 바꾸며, 산업정책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연합뉴스2017년 5월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이제 노동시장 개혁을 이끄는 의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넘어 초기업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가야 한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노동시장에 꼭 필요한 요건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점에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는 진보·보수, 좌파·우파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심지어 사용자들도 그 가치를 부정하지 못한다.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이 이 원칙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원청 대기업 소속인가 하청 중소기업 소속인가에 따라 임금격차가 크다. 그러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조항을 헌법에 넣자고 한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런데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정의당 김종철 대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찬성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야 대표들이 모처럼 사이좋게 합의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제화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법을 엄격하게 집행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이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은 이 원칙이 실현되기 매우 어려운 토양을 가지고 있다. 법을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법이 작동하기 어려운 노동시장 조건이 진짜 문제다. 기실 한국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같은 일에 같은 임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일은 달라도 가치가 같으면 같은 임금’)이 이미 법제화되어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사업주는 동일한 사업 내의 동일가치노동에 대하여는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조항이 30년 여 전인 1989년에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놀랍다고 하는 것은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매우 선진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2018년에야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법제화되었고 지난해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조항에는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가볍지 않은 처벌 규정도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있다고 해서 한국에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어느 정도라도 구현되고 있다고 보는 전문가는 없다.

ⓒEPA2018년 3월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구직 단합대회에서 대학생들이 구직 노력을 다짐하고 있다.

정의와 평등 추구하는 노조의 몫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법 조항이 실효성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에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직무평가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노동 중에서 무엇무엇이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가를 정할 기준이 없는 것이다. 결국 동일가치노동인가 아닌가는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는데, 구체적 기준이 없으니 법원도 실질적으로 거의 같은 노동에나 이 조항을 적용한다. 법 조항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지만 실제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아니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만 제대로 적용되어도 노동시장의 공정성이 크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므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인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인가를 따지기보다 후자라도 제대로 관철되게끔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법 조항엔 또 다른 중요한 한계가 있다. 이 조항들이 사업장 범위 내에서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 한계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 임금 불평등의 주요 내용이 기업(사업장) 내 불평등보다 기업(사업장) 간 불평등이라는 사실에 있다. 실증연구 결과들을 보아도 전체 임금 분산(불평등) 중 사업장 간 분산의 비중이 사업장 내 분산의 2배 이상 된다. 물론 기업 내 불평등이 문제 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것이 정규·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이다. 그런데 근래 비정규 고용의 주된 형태가 직접고용에서 간접고용으로 바뀌면서, 정규·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이 상당 부분 기업(사업장) 간 불평등으로 치환되었다(기업이 비정규 노동자를 직접고용하기보다 다른 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를 파견 등의 형식으로 사용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법은 이런 불평등 앞에 무력하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법의 적용 범위를 사업장 범위를 넘어 산업이나 업종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산업이나 업종 수준에 적용하는 법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고, 설령 제정되더라도 기능부전에 빠질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기업 울타리를 넘어 산업·업종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게 하는 일은 노사의 몫이 된다. 유럽에서는 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직무나 숙련도별 임금을 정하고, 이것이 해당 산업·업종의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됨으로써 기업 울타리를 넘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관철될 수 있었다. 근래에는 단체교섭이 분권화되면서 기업별 임금격차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으나, 노사 간 단체교섭이 산업·업종 수준의 임금 기준을 정하는 기능은 아직 살아 있다. 기업별 교섭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도 노조와 사용자들이 상급단체를 중심으로 임금인상 요구와 타결 내용을 긴밀히 조율하면 기업 간 격차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인데, 이런 조율 덕분에 일본에서는 신입사원 초임이 기업별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Wikipedia1938년 12월20일 스웨덴 살트셰바덴에서 전국생산직노조 위원장과 사용자 측 대표가 합의문에 서명하는 모습.

노사 중에서는 당연히 노동조합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은 정의나 평등을 목숨처럼 중시하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노동운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해왔고, 이것은 한국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다. 특히 선진국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소속 기업에 상관없이 균등대우를 받는 것을 중시했다. 임금은 노동자가 담당하는 노동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어야지 기업이나 사용자의 속성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기업 울타리를 넘어 실현할 핵심 주체는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어려운 과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초기업 수준에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적용되는 데 필요한 제도적·구조적 조건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단체교섭 구조가 문제다. 단체교섭이 기본적으로 기업별 교섭인 데다 조율도 거의 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실물경제의 이중구조다. 대·중소기업, 원·하청 간의 지불능력 격차가 워낙 큰 상태에서 임금수준을 평준화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현 정부 들어 최저임금 인상만으로도 영세업자들이 아우성쳤던 일이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임금격차도 문제다. 이미 크게 벌어진 기업별 임금격차를 교정하려면 저임금층의 임금을 큰 폭으로 올리거나 고임금층의 임금을 깎아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조합에게 초기업 수준에서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당위론적이거나 가혹한 요구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이 10%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나는 노동조합이 이 과제를 짊어지고 나서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노동시장의 공정과 정의를 위해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웃소싱이 확산되고 기업조직이 파편화되면서 하나의 가치사슬에 포함되는 노동자들이 다수 기업의 종업원으로 쪼개지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지속되거나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 수준에서 노동의 공정이나 정의를 따지는 것은 점점 공허한 일이 된다. 게다가 기업별 임금격차가 존재하는 한 기업은 끊임없이 내부 노동시장 인력 규모를 줄이고 외부 노동시장 활용을 늘리려 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기업별 임금격차가 중소기업의 구인난을 불러오고 다시 이것이 경제 불균형을 심화하며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노동조합이 나선다고 해도 당장 성과를 내진 못할 것이다. 갈 길이 멀고 험하다. 그러나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기초를 닦는 것만 해도, 할 일이 많다. 기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은 기본 조건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핑계로 초기업 수준에서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실현을 위한 실천을 거의 방기해왔다. ‘노동자 연대’를 열심히 외치긴 했으나, 연대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활동을 게을리했던 것이다. 한국의 제도적·구조적 조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다.

첫째, 임금정책의 기본 목표를 재설정하고 이것을 조합원과 공유해야 한다. 그간 한국 노동조합의 실질적 임금정책은 ‘임금 극대화’였다. 임금 극대화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몫을 키우자는 것이므로 노동운동이 중시하는 평등이나 정의라는 가치에 잘 부합한다. 그러나 기업별로 지불능력의 차이가 큰 조건에서 임금 극대화 전략은 당연히 기업별 임금격차로 이어진다. 그것이 누적되어 이제는 임금 극대화의 성과보다 그 그늘인 기업별 임금격차 문제가 더 부각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임금 극대화와 더불어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가 노동조합 임금정책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그동안 임금 평준화라는 과제를 완전히 외면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최근엔 기업 간 격차 문제를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노조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기업 간 임금격차 해소는 노조 임금정책의 주요 목표가 되지 못했다. 특히 기업 단위 노조들에게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만 해도 대기업 지부·지회들은 자기 사업장의 임금을 최대한 올리는 데 관심이 있을 뿐 산별노조의 임금정책에 따른 임금 조율에는 실질적 관심이 없다.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가 노조 상급단체의 슬로건을 넘어 실질적 임금정책이 되려면 조합원들에게 수용되어야 한다. 노조가 노력하면 상당한 진전이 있을 수 있다. 기업 간 임금격차가 정규·비정규직 간 임금격차만큼 불공정한 것이며, 노동시장의 공정·정의 실현을 위해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이 널리 교육되고 홍보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대부분 기업 규모나 원·하청 구조에 따른 임금격차를 당연시하는데, 이 상식을 깨는 데 노동조합이 앞장서야 한다. 다니는 회사에 관계없이 균등대우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노동시장의 기본 요건이라는 점이 조합원의 상식처럼 되는 것을 노조의 주요 활동 목표로 삼아야 한다.

ⓒ연합뉴스1997년 12월3일 세종로청사에서 임창열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가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공공부문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둘째, 연공임금의 대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연공급이 직무급이나 숙련급으로 바뀐다고 해서 초기업 수준에서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곧장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직무급이나 숙련급이 기업 수준에서 실행되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연공급에 비해 직무급이나 숙련급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더 잘 어울리는 임금체계임은 분명하다.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연공급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과 조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시되나, 견강부회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근속연수가 훨씬 짧으므로 연공급 아래에선 균등대우를 받기 힘들다. 초기업적 임금 기준을 설정하는 데도 연공급보다 직무급이나 숙련급이 낫다.

연공급의 적절한 대안이 아직 불분명하다는 점은 사실이다. 외국의 경험을 통해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직무급이나 숙련급이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나라마다 다양하다. 우리에게 적합한 대안은 우리가 창의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설령 적합한 대안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임금체계를 바꾸는 게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성이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순 없다.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개혁 방안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산업정책을 가져야 한다. 산업·업종 수준에서의 임금 평준화가 진전되면 당연히 저임금에 의존하는 한계기업들이 어려워지고 이것은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응하려면 체계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스웨덴의 연대임금 정책은 ‘렌-마이드너(Rehn-Meidner) 모델’이라는 경제정책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잘 기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도 임금 평준화와 더불어 해당 산업을 혁신할 수 있는 전반적 대안을 준비해야 한다. 여기엔 노동자의 숙련 수준을 높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도 포함되어야 한다. 렌과 마이드너가 노동조합에 고용된 경제학자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노동조합의 역할을 주문했지만, 초기업적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실현의 짐을 노동조합에만 돌려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는 초기업적 교섭의 형성과 임금 평준화 과정에서 사용자단체가 커다란 몫을 했다. 노동조합보다 사용자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기대하기 어려우니, 대신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사회적 공공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초기업적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실현은 사회적 공정성을 높이지만 노조 조합원에게는 불이익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이를 무릅쓰고 정의 실현에 나서려면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공공부문 사용자로서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 공공부문에서만은 노동조합보다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노동시장 불평등·불공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과제로 제시되고 추진되어온 것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더 이상 우리 노동시장의 전면적 개혁을 이끄는 의제가 되지 못한다. 이제 초기업 수준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사회정의를 갈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과제를 무시할 수 없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노동사회학)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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