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여 세상을 바꾸려면 호봉제부터 바꿔라

전혜원 기자 2021. 1. 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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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시장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허망한 구호다. 연공급(호봉제) 구조에서 임금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에 연공급의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시사IN 윤무영

문재인 정부 집권 5년 차다. 문 대통령의 공약집에 나오는 ‘동일노동 동일임금’만큼 모두가 공감하는 원칙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같은 일을 하는데 그 사람보다 적은 대가를 받는다면 차별당하고 있는 것이 맞다. 경제 문제인 동시에 인권 문제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한다. 전 세계 노동조합뿐 아니라 한국의 노동조합도 줄기차게 외쳐온 가치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실현되지 않았다. 현대차와 기아차 노동자가 고정급 기준으로 월 526만~528만원 정도를 받는 반면, 사측의 구조조정 위협에 따라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위축되어온 한국지엠은 월 440만원대로 현대·기아차의 85% 수준이다. 기아차 정규직의 2019년 월 평균임금(성과일시금 제외)이 666만3358원인 반면, 사내하청은 404만7112원이다. 근속 차이를 감안하면 사내하청 임금은 정규직 대비 60%대 후반~70%대 초반 수준이다. 사내하청은 정규직과 사실상 같은 일을 하며, 근무강도는 오히려 더 센 편인데도 그렇다. 같은 자동차를 만드는 가치사슬에 속해 있어도 완성차업체의 1차 사외하청 임금은 원청 정규직 대비 80%, 2차 사외하청은 64% 수준이다(2019년 민주노총 금속노조 조사).

공공기관 사이에서도 기관의 형태와 성격에 따라 연봉이 다르다. 한국중부발전 노동자는 2019년 평균 9284만8000원을 받는 반면,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그것은 4952만9000원에 불과하다. 사실상 같거나 비슷한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크게 다르다. 한국철도공사 노동자는 평균 7001만원을 받지만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기계약직은 3338만6000원을 받는다. 예금보험공사의 총무인사 담당자는 국립공원공단의 총무인사 담당자에 비해 2~3배의 임금을 수령하는 식이다.

‘하는 일(직무)’이 아니라 소속 기업에 돈이 많으냐 적으냐(지불능력)에 따라 임금이 달리 결정되는 관행 때문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면 기업의 지불능력이 어떠하든, 고용형태가 어떠하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노조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처우 개선의 원리로 내세우면서도, 이 원리를 내장한 유일한 임금체계가 직무급(하는 일을 기준으로 임금 지급)이라는 말은 안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노동’이 ‘직무’를 의미한다는 것은 그냥 상식이다.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년 차든 10년 차든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면 동일임금을 받는 게 직무급이다. 또는 A라는 직무와 B라는 직무가 있는데, 평가 결과 두 직무가 동일한 가치를 갖는 노동이면 동일한 임금을 받거나, A라는 직무가 100의 가치를 갖고 B라는 직무가 80의 가치를 갖고 있으면 임금도 100대 80이 되는 게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리다. 반면 동일한 직무를 수행해도 갓 입사한 사람보다 10년 근속한 사람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연공급’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에 입각해 있지 않다.”

ⓒ시사IN 조남진2018년 11월 현대차 울산공장 제4출입구를 통해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연공급이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체계다. 호봉제가 대표적이다. 연공급하에서도 직군별로 임금이 다르거나, 직급에 따라 임금이 오르거나, 직무수당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 ‘직무 요소’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임금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 ‘그 사람이 해당 기업에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에 있다면 연공급으로 봐야 한다.

전체 노동시장에서 호봉제 도입 비율은 14.4%에 불과하다(2020년 6월 기준). 기업 중에서 14.4%가 직원 전체나 일부에 호봉제를 적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100인 이상 사업체에선 이 비율이 54.9%로 뛴다. 300인 이상은 59.1%, 1000인 이상은 69%가 호봉제를 도입하고 있다. 다만 상당수 기업들은 여러 임금체계를 혼합해 운영한다. 직원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를 평가해 연 단위로 임금을 결정하는 ‘연봉제’나 기업·부서별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성과배분제’도 민간부문 사무직을 중심으로 상당 부분 도입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연봉제라 해도 비교적 ‘연공급적 성격(연공성)’이 강하며, ‘한국 임금체계의 연공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연공급의 핵심적 장점으로 ‘생계비 곡선에 부합한다’는 점이 꼽힌다. 나이 들수록 돈 쓸 데가 많아지는데, 연공급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므로 생계비 충당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극대화해 생계비를 최대한 확보하는 전략을 써왔고, 연공급 형태로 이를 관철해왔다. 이를 ‘생계비 확보’ 원칙이라 부르자.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은 기업별로 쪼개져 있다. 개별 기업의 노사가 마주 앉아 임금을 교섭한다. 각 노동조합들은 ‘우리 노조 소속 노동자’만의 ‘생계비 확보’ 원칙을 고집해왔다. 문제가 발생한다. 지불능력이 있는 큰 기업에선 노조가 연공급하에서 높은 생계비를 따낼 수 있다. 그러나 지불능력이 떨어지는 작은 기업에서는 그렇게 할 엄두도 낼 수 없다. 사실 지불능력이 낮은 대다수의 기업엔 노조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1.8%에 불과하다.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앞서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는 임금체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무체계’) 기업이 60%다. 이 비율은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높아서, 5인 미만 사업장의 73.3%는 임금체계가 없다. 여기는 사실상 최저임금으로 굴러간다.

‘생계비 확보’ 원칙이 우선시되는 동안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특히 기업 간 임금격차 해소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거의 관철되지 못했다. 대기업 정규직 임금이 100일 때 대기업 비정규직 임금은 64.5, 중소기업 정규직 임금은 57,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2.7이다(2019년 기준).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대기업 비정규직 임금이 더 높다. 한국에서는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보다도 어떤 기업에 다니느냐에 따른 임금 차이가 더 크다. 심지어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해도 그렇다.

이것은 당연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독일, 스웨덴 등에서는 ‘어느 기업에 다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 기업별 노동조합이 아닌 ‘산업별 노동조합’이 해당 산업의 고용주 단체와 임금 등 노동조건을 교섭(산별교섭)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기업 간 임금격차가 크게 나기 어렵다. 노조가 기업별로 쪼개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인데, 일본에선 그나마 기업 간 조율이 이뤄진다. 한국은 기업을 넘어서는, 즉 ‘초기업적’ 차원의 임금 조율이 취약하다.

기업 간 임금격차가 심각하다는 데는 노동조합도 이견이 없다. 노조들은 초기업적인 임금 조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도 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꼭 직무급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상수 공공운수노조 철도노조 위원장은 “기업 간 격차를 꼭 직무급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지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교사는 어느 지역 어느 학교에 다녀도 똑같은 임금을 받는다. 근속연수에 따라 호봉만 오른다. 만약 철도나 지하철 같은 궤도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봉체계를 합의하면, 철도공사에 다니든 인천교통공사에 다니든 임금격차가 나지 않는다. ‘산업별 호봉제’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할 수 있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일까? 우선, 호봉제 같은 연공급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리와 논리상 충돌한다. 한 기업 내에서 같은 업무를 하는 신참 직원과 고참 직원에게 다른 임금을 주기 때문이다. 정승국 교수는 “만약 노동조합이 연공급을 주장하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를 빌려 논리를 구사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주장해선 안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연공급 체계가 지속되길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노동조합이 연공급 유지를 드러내놓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업 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다소간 포기하더라도 연공급을 모두에게 주는 방식으로 기업 간 격차를 축소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느 기업에 다니든 아주 대략적인 직종별 차이만 있고 모든 노동자가 사실상 ‘동일임금’을 받는 길을 추구한다면, ‘생계비 확보’ 원칙을 지키면서도 노동자 사이의 평등을 촉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연공급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생계비 확보’는 어디까지나 장기근속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개념이다. 2021년 한국에서 모든 사람이 장기 고용될 수 있는 상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전체 일자리의 평균 근속기간은 5년이다(2019년).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짧은 편이다. 회사가 금세 망하거나 근무환경이 열악해 이직이 잦은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는 근속연수가 더 짧다(대기업 7.7년, 중소기업 3.3년). 임금체계가 없는 곳이 많은 민간 중소 영세기업들이 호봉제를 감당할 만한 지불능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고용이 불안정한 기간제 계약직이나 용역·파견·특수고용직·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 등은 애초에 연공급을 적용받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결국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는 물론이고 점점 늘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 노동자에게 연공급은 실현되기 어려운 임금체계다.

연공급이 모두의 임금체계가 될 수 없다고 해도, 이것마저 없애면 ‘하향평준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기존 연공급은 소수의 혜택으로 남겨두고, 중소 영세기업이나 비정규 노동자의 조건을 끌어올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식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은 어디까지나 임금의 최저선일 뿐이다(안 지키면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것만으로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기엔 한계가 있다. 어느 정도 숙련을 지닌 노동자 사이의 임금 형평성도 필요하다.

“연공급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노동사회학)가 말했다(20~ 23쪽 기사 참조). 기업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근속연수에 따라 숙련이 상승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단순 직무의 비정규화·외부화를 대거 추진했다. 그 결과 대기업의 직접고용 비중이 현저히 축소되었다.

실증연구가 있다. 2014년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 임금의 연공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비정규직(계약직·단시간·용역·파견 등 해당 사업체에서 발견되는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았다. 임금 연공성이 하위 10%에 속하는 기업의 비정규직 비율은 15%인 데 비해, 임금 연공성이 상위 10%인 기업에서는 이 비율이 약 33%로 뛰었다(권현지·함선유, 〈연공성 임금을 매개로 한 조직 내 관계적 불평등:내부자-외부자 격차에 대한 분석〉, 2017). 정규직 등 기업의 ‘내부자’들이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연공급적 임금체계를 요구하며, 이는 ‘노동시장 분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임금이 높고 고용이 안정된 ‘1차 노동시장’과 그렇지 못한 ‘2차 노동시장’으로 분절되어 있고 그 격차도 극심하다. 이런 상황에서 연공급은, 1차 노동시장의 규모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유일하진 않지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연구를 진행한 권현지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연공급은 근속과 임금을 연계한 체계이므로, 장기근속이 기대되는 노동자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따로 분리해 관리하는 시스템을 쉽게 정당화한다. 조직 내 ‘내부자(예컨대 정규직)’가 희소한 자원을 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내부자의 규모를 제한하는 기제로 연공급이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정승국 교수는 “한국 노동시장에서 연공급은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들이 독특하게 누리는 ‘렌트(rent·지대)’의 성격이 강하다. 이들의 임금이 갖는 렌트적 성격을 줄여주는 유력한 수단 중 하나가 직무급이다”라고 말했다. “직무급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할 유력한 수단이다. 연공급이란 게 사실,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에게는 가장의 임금을 주는 가족임금의 의미도 있다. 연공급을 개인 단위 임금인 직무급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청년 초임을 높이고 비정규직, 여성의 임금을 높이는 중장기적 운동이 될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2014년 11월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가 파업에 돌입하며 총파업 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처우개선과 호봉제를 요구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서 중요한 걸림돌

연공급이 고용을 비정규화·외부화하는 요인이라면,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진단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간 노동조합이 노동시장 불평등을 해소하는 핵심 과제로 설정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였다. 문재인 정부에도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이에 따라 2017년부터 최근까지 공공부문에서 20만명 가까운 인원이 ‘정규직화’되었다. 이 중 대다수가 정부부처 등 중앙행정기관이나 지방정부, 공공기관, 교육기관 등에 ‘직접고용’되었다. 이들은 ‘무기계약직’, 즉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계약을 한 노동자다. 사전적 의미의 정규직이다.

그런데 이 무기계약직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정규직이 아닌 ‘무늬만 정규직’ 또는 ‘중규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완전한 정규직’의 요건은 호봉제이기 때문이다. 한 공공기관 노조는 직접고용 방식으로 대규모 인원을 정규직화하는 작업에 적극 나섰다. 그런데 호봉제를 적용해달라는 무기계약직들의 요구가 분출했다. 이에 대해 그 공공기관 노조의 젊은 ‘기존 정규직’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다르게 들어왔는데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학교회계직(과거 비정규직이었다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조리원, 교무실무사, 돌봄교사 등 여러 직종)이 9급 공무원 임금의 80% 수준으로 임금을 끌어올리는 ‘공정임금제’를 요구하는 배경에도 호봉제가 있다. 공무원은 호봉제를 적용받는 대표적 직군이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 사이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이 꼭 호봉제여야 할까?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장은 “근속연수가 올라가도 숙련이 제한적으로 올라가는 직종까지 공공부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호봉제를 적용해야 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자칫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하는 민간부문 노동자들과 격차가 확대될 수 있다. 노조들은 직무별로 임금에 차등을 두는 데 거부감이 있는데, 그렇다면 같은 공공기관 사이,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사이의 임금 차등은 차별이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직무급이 사측의 탐욕이나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이라면, 연공급 사수 투쟁을 계속하면 된다. 그러나 저성장 고령화 국면에서 연공급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연공급 아래서 기업은 장기근속자일수록 생산성에 비해 인건비가 높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희망퇴직·권고사직 따위로 사람을 자꾸 내보낸다. 적어도 민간부문에서 연공급제는 고용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연공급의 긴장 관계는 현실 세계에서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특히 공공부문에 새로 편입된 ‘기존 외부자(예컨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들에게 연공급을 적용하면, 자칫 공공부문과 민간 사이의 임금 차이가 오히려 벌어지거나 심지어 공공부문 신규 채용 여력이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모든 사람을 정규직화해 연공급을 주자’는 노조의 최대 강령은 이런 비판에 능숙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노동조합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얼버무리는 동안, 정부는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왔다. 공공부문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이들 중 가장 많은 5개 직종(청소·경비·시설관리·조리·사무) 상당수에 대해 ‘표준임금체계’라는 이름의 직무급이 도입되었다. 노동조합들은 반대했다. 직무 가치를 평가하는 데(즉, ‘시설관리의 가치는 얼마’ ‘조리의 가치는 얼마’ 등) 노조가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부는 그 가치를 가장 낮게 평가한 직무의 임금수준을 ‘최저임금’으로 정했다. ‘무기계약직들을 저임금에 묶어둔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표준임금체계는 이번에 정규직화된 무기계약직만을 대상으로 도입되었다. 기존 정규직에겐 직무급이 적용되지 않는다.

정부는 올해(2021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직무급을 도입하는 곳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로 했다. 기존 정규직의 임금체계도 직무급으로 개편하라는 신호다. 노동조합들은 기관별로 직무급을 따로따로 도입하는 것은 임금격차 해소와 관련이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조상수 철도노조 위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노동계로서는 산업별 호봉제를 하면 가장 좋겠지만,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면 직무급제도 논의할 수 있다. 하나는 기업 안에서 직무별로 임금을 쪼개는 게 아니라 기업 간 임금격차를 산별교섭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철도공사 안에서 기관사, 차량정비, 선로 유지보수, 역무 등 각 직종이 임금교섭 때마다 ‘우리 임금을 더 올려달라’고 갈등이 벌어진다. 기관 안에서 직무급을 추진하면 직종 간 분열이 생긴다. 다른 하나는 사회보장체계 확립이다. 공공부문에서 기형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도 조합원들은 다 생활이 쪼들린다고 한다. 자녀 교육이나 집값 대출을 갚는 데 쓰는 것이다. 적어도 교육이나 주택에서 공공성이 확보되어야 직무급을 논의할 수 있다.”

연공급이 ‘이연임금제(젊을 때 적게 받는 대신 나이 들어 더 많이 받는다는 의미)’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도 노조가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조상수 철도노조 위원장은 “호봉제라는 게, 나중에 많이 받을 걸 기대하고 젊었을 때 조금 받는 것을 감수하는 거잖나. 그 노동자들에게 ‘그땐 고생했지만 지금은 조금 받으라’ 하기가 어렵다. 그 노동자 개인에겐 불합리하기 때문에 소송이 속출할 수도 있다. 만약 새로 들어온 분부터 (직무급 등 새로운 임금체계를) 적용하면 그런 부담은 없어질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한 준정부기관 노조위원장은 “새로 들어오는 직원부터 적용한다고 해도 4~5년 먼저 입사한 기존 정규직과 형평성에서 문제될 수 있다.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금체계 개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안정적인 위치에 있다. 어느 정도의 주거와 교육 공공성이 확보되면 임금체계 개편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노동조합이 이를 위한 ‘증세’에 적극 나서고 있지도 않다. 산별교섭이라면 2003년부터 금속노조, 2004년부터 보건의료노조가 이미 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임금은 여전히 개별 기업 단위에서 결정된다.

ⓒ연합뉴스2018년 4월 서울 단대부고에서 삼성그룹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 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고사장 밖으로 나서고 있다.

‘직무 기반 임금체계’라는 사회계약

노동조합의 우려 중 직무급이 기업 단위에서만 적용되면 효과가 없으리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노조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인정한다면 기업 내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정이환 교수는 노조가 사측보다 먼저 나서서 사내 불안정 노동자들의 직무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기업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거나 비슷한 능력이 있지만 단지 중소 영세기업에 다니거나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최저임금에 가까운 단일임금을 받는 사람들도 자신의 숙련을 높이면 임금을 상승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주장되어왔다. 이 주장이 성사되면 좋은데, 지난 20년간 성과는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노조의 최대 강령(‘모든 사람을 정규직화해 연공급을 주자’)은 어렵다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현실에서 더 잘 작동 가능한 구체적인 대안을 궁리해야 한다. 예컨대 원하청이나 같은 기업 내 무기계약직, 기간제 노동자가 하는 일을 분석해서, ‘이 업종에서 이 정도 숙련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기준을 노조가 사측에 요구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단순명료하지 않고 복잡하고 골치 아프고 지저분해 보이겠지만, 그런 일을 노조가 해야 한다. 시궁창에 발을 담가야 한다.”

물론 노조로서는 차선책이다. 연공급이 직무급으로 바뀐다고 할 때 ‘노동계급’ 차원의 이익(고령자 고용안정, 양질의 일자리 증가, 저임금층 임금 상승)이 손해(고임금자 임금 하락 또는 정체)보다 크다고 단언할 수 없다. 노조가 우려하는 ‘하향평준화’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이 임금체계 개편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노동시장에서 정의가 더 잘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소 영세기업의 지불능력과 지속성을 고려할 때, ‘모든 노동자들이 연공급을 받아야 한다(연공급의 보편화)’는 대안엔 현실성이 없다. 격차를 해소하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연공급이 사회적 기준으로 작동하긴 어렵다는 이야기다. ‘근속연수’와 그 사람이 다니는 기업의 지불능력, 그리고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현재의 노동시장이 더 정의로운지, 아니면 그 사람이 하는 일(직무급)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노동시장이 더 정의로운지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원·하청 격차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보다 ‘원청이든 하청이든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하면 비슷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격차 축소에 훨씬 강력할 수 있다.

전체 실업률 대비 청년실업률은 2000년 1.8배에서 2017년 2.7배로 높아졌다(한국은행, 〈우리나라 고용구조의 특징과 과제〉, 2018). 청년실업의 원인이 구조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에서는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시장의 격차가 큰데 이동성은 낮다. ‘첫 직장이 어디냐’가 평생을 좌우한다. 일단 중소기업에 들어가면 그 경력 자체가 일종의 낙인처럼 따라다닌다. 중소기업 노동자가 1년 뒤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2004~2005년 3.5%에서 2015~2016년 2.2%로 더 낮아졌다(한국은행,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2018). 반면 취업 재수 등으로 구직 기간이 어느 정도 길어져도 일자리가 나빠지는 효과는 크지 않다. 이러면 청년 처지에선 취업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1차 노동시장 진입을 노리는 게 합리적 선택이 된다.

만약 어느 기업에서 일하든지 ‘이 정도 숙련이 필요한 일을 하면 얼마를 받는다’는 기준이 있다면,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도 숙련을 증진시켜가며 사다리를 타고 옮아갈 수 있다. 이러면 장기적으로 채용 방식도 기존의 공채에서 직무 중심 채용으로 전환되게 된다. 기업 내 차등을 인정하는 대신 기업 간 평등을 추구하면서 노동시장의 이동성을 높이는 큰 변화다. 더 미룰 수 없는 변화이기도 하다. 권현지 교수는 “정부가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에게도 질서를 부여하고, 노조도 넓은 범위의 직무 기반 임금체계를 정립해서 차별을 해소하며 연대를 촉진하는 사회계약에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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