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뛰어넘은 '약자와의 연대', 희망연대노조의 성공

박찬수 2021. 1. 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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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5
2014년 12월15일 씨앤앰(현 딜라이브) 비정규직 노동자 2명이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 전광판 위에서 해고자 원직복직과 고용안정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때 정규직 조합원들은 지상에 천막을 치고 비정규직을 지원하는 연대파업을 벌였다. 사진에서 전광판 위의 두 노동자 뒤로 정규직 농성 천막이 보인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정말 대단한 건, 지금은 정규직 전환도 많이 됐지만 여전히 월급도 적고 비정규직도 많은데, 단체협상에서 어떻게든 사회연대기금을 마련해 (지역사회를) 돕는 거예요. 자기들도 힘든데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꾸준히 돕는 게 진짜 대단하죠. 노동운동이란 게 그렇잖아요, 약자를 돕고 사회연대의 중심이 되는 건데, 지금 한국 사회에선 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고…, 그래서 저는 희망연대노조가 노동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해요.”

‘희망연대노조’라는 이름의 노동조합이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에 설립신고서를 낸 건 2009년 12월이었다. 케이블 설치기사와 콜센터 상담원, 방송스태프 등을 조합원으로 하는 지역노조인 희망연대 설립신고서를 보더니 근로감독관은 ‘명칭이 너무 낯설다’며 머리를 긁적였다고 한다. 서부지청은 본부(고용노동부)에 문의를 해보고서야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줬다.희망연대노조는 이듬해인 2010년 1월 케이블방송업체 씨앤앰(C&M, 현 딜라이브)에 첫 지부를 건설했다. 정규직 직원 150여명이 가입했다. 그렇게 첫걸음을 뗀 희망연대는 10년이 흐른 지금, 딜라이브·엘지유플러스·에스케이브로드밴드·다산콜센터 등 13개 지부에 6천여명의 조합원을 둔 노조로 성장했다. 케이블방송과 통신, 콜센터의 정규직·비정규직을 함께 포괄하고 있다. 지난 12월24일 치른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선 희망연대노조의 산파 구실을 한 김진억(노조 나눔연대국장)씨가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에 당선됐다. 의미 있는 전진이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보다 뜻깊은 건, 희망연대노조가 걸어온 궤적이 대부분의 여느 노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희망연대노조는 출발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를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조합 설립을 적극 지원했고, 비정규직 파업에 동참했다. ‘연대임금’이란 이름으로 매년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임금을 조금씩 더 올리며 임금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희망연대노조 첫번째 지부인 씨앤앰 정규직 지부는 초기부터 회사 쪽과 단체협상에서 사회연대기금 조성을 명문화했다. 처음에 회사는 ‘연대기금 대신에 임금을 조금 더 올리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 기금으로 지역 청소년과 장애인·이주노동자를 돕고, 네팔 어린이들을 지원한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는 멋진 말이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노동현장에서 ‘연대’와 ‘단결’은 말처럼 쉽지 않죠. 그래서 노조를 만들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냐’ ‘어떻게 함께 싸울 수 있었냐’였던 거 같아요.” 이동훈 희망연대노조 위원장(전 씨앤앰 지부장)의 말이다.

씨앤앰 정규직 노조는 설립 이듬해인 2011년부터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비정규직 지부’를 만드는 일에 나섰다. 그때 정규직-비정규직이 만든 노조준비모임의 이름이 ‘함께 살자’였다. 그렇게 2년여간 조직 작업을 한 끝에 2013년 2월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지부’를 결성했다. 2014년 비정규직 조합원 109명이 계약 해지를 당하자, 정규직은 연대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 조합원 두 명이 서울 프레스센터 앞 전광판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간 뒤 정규직은 전면 파업으로 이들을 지원했다. 이 싸움은 희망연대노조의 승리로 끝났다.

지금 다시 이동훈 위원장에게 물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어떻게 비정규직과 함께 싸울 수 있었나.” 이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사실 다른 사업장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협력업체 직원들은 예전에 한솥밥을 먹다가 외주화가 진행되면서 회사를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외면하기 어렵고, 그분들이 처한 상황이 우리의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씨앤앰 정규직 지부를 만들고 첫해에 150명이 파업을 했는데, 그 기간에 김진숙·하종강 선생 등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그분들이 강연에서 강조한 게 이거였다. ‘여러분이 비록 저임금 정규직이긴 하지만, 더 힘든 비정규직이 훨씬 많으니 그들을 돕고 함께해야 한다.’ 파업기간에 이 문제를 갖고 정말 토론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 투쟁 지원 때) 정규직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게 많이 어렵지는 않았다.”(이동훈 위원장)

희망연대 딜라이브 지부(씨앤앰의 정규직·비정규직 통합지부)는 임금인상 협상에서 10년 동안 지켜온 원칙이 있다. ‘연대임금’이라 부르는 정액 임금인상이다. 정액 인상은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과 기능직 등에 유리하다. 평균임금이 그리 높지 않은 케이블업계에서 정규직 노조가 매년 ‘연대임금’을 추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018년엔 회사와 최저임금 1만원에 합의해서 기술직 30여명과 콜센터 상담직 70여명의 통상임금이 크게 올랐다.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2000년대 초반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업무를 담당했다. 그때 산하 노조에 ‘하후상박으로 정액 임금인상을 하라’고 얘기했지만 현장에선 실행이 안 되더라. 정규직 조합원은 일단 내 임금을 지키려 한다. 임금격차 축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도 내 사업장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례를 많이 봤다. 그래서 희망연대를 만들면서 ‘연대임금’ 실현을 하나의 목표로 잡았다”고 말했다.

놀라운 건 또 있다. 희망연대는 설립 초기부터 단체협상에서 사회연대기금을 꾸준히 조성해 지역사회를 돕고 있다. ‘사업장에 매몰된 노조운동’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약자와 연대하는 새로운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기획실장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평등 가치가 약해지고 사회연대가 후퇴하는 건 불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희망연대노조가 걸어온 길은 평등 가치의 회복과 노조운동 고립화를 막는 유력한 실천방식임이 분명하다. 이걸 통해서 사회적으로 노동운동의 잃어버린 주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정부지역 7개 사회단체 모임인 ‘의정부 정의로운 노동인권 네트워크’(의정로넷)는 2018년 하반기부터 매년 3천만원씩의 연대기금을 딜라이브 지부에서 지원받는다. 이 기금으로 이주 농업노동자들에게 여행 기회를 주고,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장애인들과 함께 제주도를 찾는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겐 돌봄과 함께 노동·인권에 관한 교육을 펼친다. “사회공헌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홍보만 생각하고 재정 지원을 하는 데 그치지만, 희망연대노조는 조합원들이 직접 찾아와 함께 어울린다. 장애인들과 제주도를 갈 때는 조합원 10여명이 동행해 이들의 여행을 도왔다”고 최혜영 의정로넷 사업단장은 말했다.

“정말 대단한 건, 지금은 정규직 전환도 많이 됐지만 여전히 월급도 적고 비정규직도 많은데, 단체협상에서 어떻게든 사회연대기금을 따내서 (지역사회를) 돕는 거예요. 자기들도 힘든데 사회적 약자를 꾸준히 돕는 게 진짜 대단하죠. 노동운동이란 게 그렇잖아요, 약자를 돕고 사회연대의 중심이 되는 건데, 지금 한국 사회에선 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고…, 그래서 저는 희망연대노조가 노동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해요.”(최혜영 사업단장)

그렇게 희망연대의 기금 지원을 받는 곳은 수도권 10여개의 사회복지단체 연합체, 액수로는 매년 3억여원에 이른다. 2014년부터는 효율적 지원을 위해 ‘희망씨’라는 사단법인도 만들었다. 희망씨 사업 중 ‘네팔 어린이 돕기’는 작은 노조의 연대 활동이 어디까지 뻗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2003년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법무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하자, 몇몇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다. 이 가운데 네팔 노동자 4~5명이 있었고, 이들은 도움을 준 김진억 현 민주노총 서울본부장과 친분을 맺었다. 네팔 노동자들은 끝내 2009년 강제 추방됐다. 2012년 김진억 본부장과 희망연대 조합원들은 추방된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겸 네팔을 방문했다. 그때 네팔 포카라 지역에 학교가 없어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4천만원을 지원해서 2층짜리 학교 건물을 지었다. 이후 매년 교사 월급과 학습자재 구입비용으로 2700만원 정도씩을 꾸준히 보내고 있다. 처음 20명이던 학생은 80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가장 큰 소망이 한국을 방문하는 겁니다. 비용은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는데, 네팔에서 이 사업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한국에서 강제추방된 이주노동자들이라 재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해요. 재정적 어려움보다 이 문제가 아이들의 한국 방문엔 더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김은선 희망씨 상임이사)

“요즘 조금씩 확산되는 ‘임금연대’ ‘고용연대’ ‘지역사회연대’의 모티브를 희망연대가 제공했다”고 한석호 전태일재단 기획실장은 평가했다. 한 실장은 “우리 노동운동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조합원의 임금과 고용, 복지 중심으로만 가는데, 그런 운동은 안 된다고 하면서 10년 전에 새로운 깃발을 든 게 희망연대노조다”라고 말했다.

박찬수ㅣ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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