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앞장서 장애인의 '재판 받을 권리' 지켜줘야" [차 한잔 나누며]

이창수 2021. 1. 2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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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용어 수어집' 힘 보탠 대구지법 권형관 판사
법원내 수어통역사자격증 유일
감수 맡아 '수어·법률' 생각 좁혀
곧 '장애법연구반' 창립총회 계획
"재판정은 장애가 있든 없든 간에
누구에게나 평등한 공간이어야"
전국 법원에서 유일하게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권형관 대구지법 판사가 지난 10일 대법원 청사에서 ‘형사절차에 관한 법률용어 수어집’ 발간 배경과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세상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함도 이 중 하나다.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 용어가 범람하는 법원은 그 불편함이 유달리 커지는 공간이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법정 수어통역비용 국가 지원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판결문 서비스가 지난해서야 비로소 도입된 데에서 볼 수 있듯 그동안 법정 문턱은 장애인들에게 높기만 했다.

“재판정은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평등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지난 10일 대법원 청사에서 만난 권형관(38·사법연수원 40기) 대구지법 판사는 “법원이 앞장서서 장애인의 ‘재판 받을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 법원에서 유일하게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지난달 법원행정처가 낸 ‘형사절차에 관한 법률용어 수어집’ 발간에 힘을 보탰다. 감수를 맡아 법률용어가 낯선 수어 전문가와 수어를 모르는 법률 전문가 사이의 간극을 좁혔다.

“군법무관 시절 ‘타인에게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수어를 배워봤어요. 그러면서 차츰 장애인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됐죠.”
권 판사도 처음부터 장애인 사법지원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그는 “불편함이 하나둘 눈에 밟히면서 어떤 ‘안테나’가 켜졌다”고 했다.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느냐”는 재판장 질문에 당황한 얼굴로 ‘나는 농인입니다’는 손짓만 반복하던 어느 피고인에 대한 기억도 그중 하나다. 노점상 철거에 맞서다 법정에 선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제가 수어를 아니까 그분께 ‘수어통역사가 필요하시냐’고 묻고 수어통역사 지정을 위해 공판기일이 미뤄진 사실을 알려드렸어요. 만약 그때 수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최소한의 안내조차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겠죠.”

그는 그러면서 농인 친구와 겪은 일화도 소개했다. “밥을 사겠다”는 친구가 농인임을 알아챈 식당 종업원이 지레짐작으로 권 판사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는 것.
“불편한 심기를 강하게 드러내던 친구를 보며 설령 악의(惡意)가 없는 행동이더라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어요.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장애인에게 어떠한 배려가 있어야 하는지를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렇게 조금씩 주의를 기울이자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생겼다. 꼭 언어만 문제가 아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법원에선 지금도 휠체어가 피고인석이나 변호인석, 법정 안으로 들어서지 못해 복도나 문턱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정 다툼 이전에 법정에 이르는 일부터가 누군가에겐 커다란 난관인 셈이다.
2013년 이후 7년 만인 지난해 개정된 ‘장애인사법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은 이런 고민이 하나둘 모여 나온 결과물이다. 그가 몸담았던 법원행정처 ‘장애인사법지원연구반’이 외부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만든 이 책자에는 장애인 사법지원의 법적 근거부터 장애의 개념과 유형, 절차 등 실무에 이르기까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 두루 실렸다. 장애인에 대한 사법지원은 한두 명 개인의 선의가 아닌 조직 전체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지난해 연구반 주도로 가시적인 변화가 여럿 있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예산 편성권이 없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동안 법원의 변화 속도는 사회 전반과 차이가 컸다. 지난해 대법원이 어떤 유형의 장애인들이 얼마나 법원을 이용하는지, 법정에서 어떤 불편함을 겪는지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처음 실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태껏 기본 데이터조차 없었으니 개선이 더딜 만도 했다.
조만간 권 판사는 선·후배 동료 판사 40여명과 함께 ‘장애법연구반’ 창립총회를 열 계획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법지원이 그때그때 단발성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큰 흐름을 꾸준히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이를 “법원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장애인들에게 특혜를 주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재판 받을 권리는 누구나 누려야 할 헌법상 기본권입니다. 법원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속도가 조금 느릴지언정 옳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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