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의 햇빛] 마법의 눈송이

한겨레 2021. 1.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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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햇빛에 반사되어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제설차는 도로에 염화칼슘을 뿌려대고, 공항 활주로에서는 눈을 치우느라 분주해진다.

30분 또는 1시간 간격으로 쌓인 눈의 높이를 보고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는 소규모 비행편대가 북쪽 루트를 따라 도버해협을 왕복하며 알루미늄 눈구름을 날려 보내, 독일군 레이더 화면에는 이곳으로 대규모 군단이 침투하는 듯 꾸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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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진의 햇빛]

이우진의

햇빛

눈이 오면 햇빛에 반사되어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별이나 바늘 모양의 얼음 결정들이 서로 뒤엉켜 지상에 안착하면, 아이들은 제철을 만난 듯 마냥 즐겁지만 빙판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힘겹게 지나는 이들도 있다. 눈은 비와 달리 순식간에 도로에 몇 센티미터 이상 쌓이기도 하고, 이에 따라 급속히 정체 구간이 늘기 때문에 발 빠른 대비가 우선이다. 제설차는 도로에 염화칼슘을 뿌려대고, 공항 활주로에서는 눈을 치우느라 분주해진다. 전국 각지의 기상 관측소도 바빠지기는 마찬가지다. 30분 또는 1시간 간격으로 쌓인 눈의 높이를 보고한다. 눈은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날려 다니므로, 쌓인 눈의 여러 부위를 꾹꾹 찔러보아야 고르게 측정할 수 있다. 예보본부에서는 접근해오는 눈구름의 동태를 파악하느라 레이더 화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레이더는 전자기파를 발사하여 되돌아오는 신호를 이용해서 목표물을 탐지한다. 들짐승이나 날벌레가 어두운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가졌다면, 사람은 대신 발명한 레이더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처해왔다. 영국이 해안을 따라 레이더 방어망을 구축한 지 얼마 안 돼, 독일군은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영국 공군은 독일 전투기가 해협을 건너기도 전에 레이더로 보고 한발 앞서 대응 출격할 수 있었다. 그러자 독일군은 야음을 틈타 전자기 빔으로 목표 지점을 가리키고, 전폭기는 전자기 빔의 안내에 따라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 공군은 더 강력한 전자기 빔을 발사하여 상대의 전자기파를 교란했다. 양쪽은 보이지 않는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상대 목표물을 탐지하거나 이를 방해하기 위한 물고 물리는 기술 경쟁에 나섰는데,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마법사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출격하여 서해를 건너오는 눈구름은 자연이 만든 스텔스 비행 군단이다. 눈송이는 부풀어진 솜사탕처럼 작은 구멍이 많아 소리를 흡수하여 조용하게 움직인다. 구축함에 접근하는 전투기처럼 눈구름은 레이더 빔을 피해 저공으로 비행한다. 엔진에 불을 때서 고열로 움직이는 비행기와는 달리, 눈구름은 영하의 온도에다 지면과도 가까워 열 감지 카메라로도 분간하기 까다롭다. 바다 위로 넓게 퍼진 수많은 얼음 조각은 각각 레이더 빔을 분산시켜, 어느 목표물을 정조준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멀리 보는 레이더를 가지고도 심야에 눈구름을 분석해내는 데 애를 먹는 이유다.

영국 여성 과학자 조앤 커런은 1942년 독일군 레이더를 교란할 작정으로 알루미늄 리본을 비행기에서 날려 보내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고는 리본 커튼 뒤에 숨어 비행하면 적의 레이더가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냈다. 레이더 빔이 수많은 알루미늄 리본에 먼저 부딪혀 산란하면, 마치 눈구름 뒤편에 숨은 것처럼 뒤따르는 비행기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는 소규모 비행편대가 북쪽 루트를 따라 도버해협을 왕복하며 알루미늄 눈구름을 날려 보내, 독일군 레이더 화면에는 이곳으로 대규모 군단이 침투하는 듯 꾸며댔다. 독일군의 시선이 분산된 사이에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남쪽 루트를 따라 프랑스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요즘도 화창하게 맑은 날 레이더 화면에 가짜 눈구름이 나타날 때가 있다. 철새 무리를 눈구름으로 오인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레이더 빔을 교란하기 위한 군사 훈련이 진행되며 하늘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날아다닐 때다. 전쟁 목적으로 발명된 기계가 지금은 눈구름을 조기에 탐지하는 용도로도 쓰이고 있어 고맙기는 하지만, 창과 방패의 기술 경쟁이 예나 지금이나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변치 않는 야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길 없다.

이화여대 초빙교수(과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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