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골 넣은 '손흥민', 놀고 먹는 '마기'..문득 찾아든 낙서같은 위로
80대 최전성기 맞은 '할머니 화가' 와일리
천진한 화풍 150점 중 손흥민시리즈 첫선
노래·쿵푸하는 캐릭터 마기 만든 르페브르
낙서같은 100여점으로 '위기극복힘' 전파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그 세리머니가 보인다. 골을 넣을 때마다 두 다리를 접어 그라운드에 미끄러지는 제스처. 가끔 무릎관절이 온전할지 걱정하게 만드는 그이는 축구선수 ‘손흥민’이다. 사진·영상에서는 단골손님이지만, 이렇게 뜰 줄은 몰랐을 거다. 물감으로 칠해지고 연필로 그어진 채 말이다. 생김새로 알아보긴 쉽지 않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듯 ‘쓱싹’이니까. 큰 얼굴과 짧은 다리, 뛰고 있는지 산책 중인지 구분이 안 되는 엉거주춤한 몸짓. 대신 백넘버 7이 빛나지 않는가. ‘SON’이란 이름도 선명하고. 이거면 충분하다. 존재 자체로 위로고 위안이다.
#2.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 여인. 실룩실룩 엇박자로 춤을 추고, 마이크야 부서져라 노래를 하며, 원더우먼·슈퍼맨의 코스프레도 심심치 않다. 그게 아니라면 글러브 낀 손을 휘두르든지 쿵푸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프랑스 태생인 이 여인의 이름은 ‘마기’. 하지만 누구도 실체를 본 적은 없다. 마기는 그림 안에서만 산다. 간결한 선과 색을 두르고, 만화 컷 같은 동작으로. 움직임이 많으면 사고도 많은 법. 그러면 어떠하랴. 무료하게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바이러스가 막아섰다고 해도. 그래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긍정의 에너지를 뚝뚝 떨궈 주니.
영국서 온 손흥민, 프랑스서 온 마기가 숨 막히는 코로나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국작가 로즈 와일리(87)와 프랑스작가 사라 르페브르(34)다. 손흥민과 마기는 이들 작가가 각자의 작품에 옮겨놓은 주인공. 한쪽은 실존인물, 다른 한쪽은 가상인물이지만 작가의 영감을 입고 태어난 캐릭터란 점에선 다를 게 없다. 그것도 정형화한 틀에 구애 받지 않는 분방한 작품세계 안에서. 규격을 벗어난 자유로움은 기본이고, 영역을 깨는 익살과 위트는 옵션이다. 유럽에서 날아왔지만 그냥 옆동네서 걸어왔다고 해도 될 친근함까지 품고서 말이다. 무엇보다 어떤 위기도 유머러스하게 넘겨버리는 ‘여유’를 가졌다고 할까. 와일리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로즈 와일리’ 전을, 르페브르는 국내 온라인 공간에서 ‘마기 드 몽마르뜨 2020년’ 전을 열고 있다.
△87세 화가, 반전 인생서 손흥민을 만나다
사실 그림의 모델인 손흥민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이는 그림을 그린 작가다. 와일리는 80대에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늦깎이 화가. 45세에 영국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며 그림의 꿈에 한발 다가섰다. 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무명생활이 몇십년.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결국 그이에게 선물 같은 성과를 안겨줬는데. 76세가 되던 2013년, 영국 가디언이 선정한 ‘가장 핫한 신예작가’ 중 한 명으로 뽑히며 제대로 데뷔한 거다. 내친김에 이듬해에는 영국 현대회화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존무어페인팅상’까지 거머쥐었다. 지금은 세계 스타작가 반열에 합류한 상태다.
단순한 구성, 천진난만한 붓질, 가공 없는 순수한 색감이 특징. 전시에는 최신작을 앞세워 회화·드로잉·설치작품 등 150여점을 걸고 세웠다. 그 가운데 단박에 우리 눈을 사로잡는 작품은 이른바 ‘손흥민 시리즈’다. 대부분 2020년에 작업한 작품들은 캔버스 유화를 비롯해 종이에 연필·색연필로 그리고 콜라주한 드로잉·스케치 등 10여점. 여기에 손흥민 유니폼에 그려 완성한 스페셜 에디션까지, 모두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왜 굳이 손흥민이냐고? 작가는 손흥민의 소속팀인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의 광팬이란다. 덕분에 손흥민의 ‘독특한’ 행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옮겨낼 수 있었다는데. 병역의무를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미친 듯이’ 골을 몰아넣는 순간 등. 특히 2019년 9월 사우샘프턴과의 경기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이 경기에서 손흥민은 4골을 연달아 터트렸더랬다. ‘손흥민 시리즈’에는 그 경기를 상징하는 ‘4’라는 숫자와 타이틀이 연거푸 이어진다.
그외에도 고양이·코끼리·새, 꽃·가위·망치, 여인 등을 다채롭게 다룬 수십 점이 시공을 교차한 ‘와일리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춤추는 쿠바의 남녀’(2016), ‘노래하는 북한 어린이’(2013)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사회상’도 시선을 끈다. “그저 보는 이에게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으면 한다”는 작가의 진짜 바람은 사실 이거다. “난 나이보다 내 그림으로 유명해지고 싶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아무도 못 말린다…‘해피 셧다운’ 외치는 핑크 립스틱
마기의 고향은 프랑스 파리 18구, 예술의 거리라 부르는 ‘몽마르뜨’다. 그래서 ‘마기 드 몽마르뜨’란다. 세상에 뚝 떨어진 지 6년. 처음부터 30대 남짓한 싱글여성이었다. 풍만한 체형에 얼굴을 반쯤 가리는 안경을 썼고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검정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화룡점정은 핑크색 립스틱. 그 독특한 외모만큼 취미도 버라이어티하다. 권투·무술 등 격투기를 앞세워 음악 즐기기, 먹고 자기, TV 보기 등. 어디 그뿐인가. 민감한 정치·사회 이슈에 열을 올리는 자칭 평화주의자다. 종종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코스프레는 그런 성향이 만들어냈을 테고.
결국 마기의 말과 행동은 작가 르페브르의 것이다. 처음엔 낙서처럼 시작했단다. 2015년 친구와 재미삼아 그린 캐릭터에 옷도 입히고 생각도 입히고. 그렇다고 기필코 이 캐릭터를 고집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꼭 마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하지만 내 인생에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사는 게 잘 안 풀리던 시절, 자신의 삶을 묶던 불만족이 튀어나왔다는 건데. 그게 마기였단다. 성공적인 이 전화위복은 몽마르뜨 동네주민을 넘어 파리지앤이 아끼는 캐릭터의 탄생을 봤다.
한국서 두 번째인 이번 개인전에는 드로잉·스케치·실크스크린 등을 넘나드는 마기의 발랄하고 유쾌한 활약이 100여점에 걸쳐 펼쳐진다. 한국전시를 연계한, ‘마기의 파트너’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지선 아티스트 에이전트는 “일러스트레이션 강국인 한국에서 관람객을 만나고 싶은 바람이 강렬하다”는 작가의 소감을 대신 전했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막아선 경계를 어서 극복하고 싶어 했다는데. 그래선가. 메인작품으로 내건 ‘수작 드로잉’ 대부분은 코로나와 관련이 있다. 요약하자면 ‘해피 셧다운’이다. “차라리 이 기간에 릴렉스 하며 실컷 먹고 자고 쉬고 놀자”는 마기의 메시지를 흩뿌리고 있는 거다. ‘봉쇄 첫날’(2020), ‘바이러스를 차 버려’(2020), ‘영웅들에게는 어려운 시기’(2020), ‘봉쇄 중에도 웃어요’(2020) 등이 현실의 ‘푸르죽죽한 우울감’을 슬쩍 날려버린다. 전시는 2월 6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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