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선택적 정의, 선택적 입법

김진우 정치부장 2021. 1. 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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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0대 국회는 ‘동물국회’ ‘식물국회’라는 오명을 얻었다. 여야의 극한 대립으로 의회 정치가 사라지고, 그러다보니 법안도 제때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현 21대 국회는 유독 ‘일하는 국회’를 강조한다. 실제 성과도 있다. 국회 선진화법이 도입된 2014년 이후 6년 만에 예산안을 법정시한에 처리했다. 또 지난 6일 국회 자료에 따르면 21대 국회는 제헌국회 이래 동일 기간 가장 많은 법안을 처리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1346건을 처리해 처리율이 20.3%였다. 20대(571건) 대비 775건이 늘어났고 처리율은 7.2%포인트 높아졌다. 입법 성적만큼은 화려한 셈이다. 그런데 속사정을 살펴보면 마냥 박수칠 수 없다. 여야가 정작 필요한 법안은 나 몰라라 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진우 정치부장

지난 8일 이름에서 ‘기업’이 빠지고 누더기가 되다시피 국회를 통과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대표적인 사례다. 매년 2000명 가까운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현실을 시정하고자 발의된 중대재해법은 지난해 내내 여당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 처리에 밀렸다. 여야가 여론에 떠밀리다시피 뒤늦게 입법에 나섰지만 결과는 전방위적인 후퇴라 할 만하다. 5인 미만 사업장이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고, 처벌 수위는 완화됐으며, 책임 범위는 모호해졌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부실 입법 관행이 반복된 것이다.

국회가 사실상 직무유기를 한 경우도 있다. 국회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낙태죄 조항에 대한 대체입법을 지난해 말까지 하지 않았다. 찬반 양측 눈치를 살피다 은근슬쩍 시한을 넘기는 무책임을 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낙태죄는 효력을 상실했지만, 안전한 임신중지 등을 위한 입법은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여론 동향에는 민감한 모습을 보인다. ‘얘기가 된다’ 싶으면 너도 나도 ‘숟가락 얹기’식 법안 발의에 나선다. 지난해 10월 16개월 여아가 양부모 학대로 숨진 ‘정인이 사건’이 올 초 한 방송매체에서 재조명되면서 여론이 들끓자 관련 법안을 내놓는 등 재빨리 움직였다. 일부 의원들은 이미 나왔던 법안들과 유사한 내용의 법안들을 ‘패키지’ 발의하며 ‘정인이 법’이라고 홍보했다.

지난해 아동학대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 수십 건이 처리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여론에 편승해 뒷북 대응에 나섰다고 비판받을 만하다. 오죽했으면 아동·청소년 문제를 다뤄온 한 변호사가 정치권을 향해 “법 만드는 것이 장난도 아니고. 제발 진정하세요”라고 했을까. 여론 잠재우기식의 벼락치기 입법이 현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야는 이들 법안들에 대해 이틀 만에 심사를 마치고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했다.

정치권의 표리부동한 행태에 시민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는 최근 온·오프라인에서 확산된 ‘늦어도 괜찮아요’ 캠페인에서도 확인된다. 이 캠페인은 과로사 문제로 시달리는 택배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늦어도_괜찮아요’ 등의 문구가 적힌 스티커 등을 집 현관이나 택배 상자 등에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치권에서도 호응이 높았다. 하지만 시민·노동계에선 입법 미비부터 보완하라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가 지난 8일 통과시킨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제정안에 택배노동자의 과로 원인으로 지목되는 분류작업(일명 ‘까대기’)에 관한 규정이 빠진 점을 꼬집은 것이다. 앞서 정치권 인사들은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에도 대거 참여했다.

여론 잠재우기식이든, 등 떠밀리기식이든 정치권이 입법에 나선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중대재해법 등의 입법 과정을 보면, 거대 양당이 여러 정치 현안에서 대립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목소리가 일치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강자와 약자, 기업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쟁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전자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선택적 정의’가 있듯이, ‘선택적 입법’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정인이 법’ 처리 과정은 웬만한 여론이 아니면 ‘어차피 안 될 법은 안 된다’는 현실을 거꾸로 확인시켜줬다. 그렇다면 입법 과정에서도 ‘목소리’를 얻지 못한 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국회에서 손팻말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출입금지를 문자로 통보받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나 ‘약자와의 동행’을 정강 정책 등에 두고 있는 거대 양당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김진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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