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일본이 외면하는 진실과 정의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2021. 1.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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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월8일 한국 사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 노예제(이른바 ‘위안부’) 생존자 12명이 일본국(日本國)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가해자 일본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역사적인 판결이다. 법의 언어로 확인된 역사의 진실이 법정에서 낭독될 때, 경청해야 할 피고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불출석한 피고를 위해 판결문은 법원 게시판에 공시되었고, 피고가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첫 ‘위안부’ 소송은 이제 더 이상 법적으로 다툴 수 없게 되었고, 소송 당사자인 피고 일본국은 판결을 이행할 법적 의무가 발생했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그러나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다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일본은 판결이 내려진 직후 남관표 주일대사를 불러 판결에 대해 항의했고, 얼마 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이번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국제법에 위반되었다며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항소할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관방장관이 사실상 내각 운영을 총괄하는 직위라는 점에서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재판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은 한국의 사법부를 일관되게 무시하고 있다.

판결의 내용을 떠나 한 명의 법률가로서 일본의 태도는 심히 유감이다. 재판의 핵심은 독립성과 중립성이다. 법원의 판결을 단순한 정치적 주장으로 매도하며 무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원고와 피고는 소송 절차에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상대방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받는다. 일본 정부의 주장대로 이번 판결이 국제법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위법한 판결임이 명백하다면 피고는 법정에서 그 사실을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2016년 이후 지금까지 5년 가까이 진행된 지난한 재판과정에서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았다. 법정 밖에서 국가는 다른 나라 법원으로부터 재판받지 않는다는 구닥다리 ‘주권면제’ 주장만 반복했다. 패착이었다.

주권면제는 국가에 부여된 권리가 아니다. 한 나라의 사법권이 제한되는 사유 중 하나이다. 물론 한 나라의 법원이 다른 나라 정부를 법정에 불러 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국가가 상대 국가에 잘못을 했더라도 타국 법정에까지 불려 나오기 전에 원만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상식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 세계에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반인권적·반여성적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서도 오랫동안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 받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가해자의 고의적인 책임회피로 피해자들이 자신의 인권침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가해자가 외국 국가라는 이유로 국가의 사법권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 보호라는 공동체의 근본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유럽인권재판소를 비롯한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영국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국민의 사법권을 강하게 보호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나라 법원에서 진행된 재판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른 척하던 일본 정부가 이번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서 다투어 보겠다고 하는 모양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진실은 결코 감출 수 없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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