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차별금지법이라는 출발점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2021. 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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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최근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가 개인정보 침해, 소수자 혐오 등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끝에 서비스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특히 이루다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거나 무분별하게 혐오발언을 하는 모습은 그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개발의 문제로만 이야기되어 온 인공지능을 인권과 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인공지능의 혐오발언, 이렇게 들으면 뭔가 거창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루다의 혐오발언은 그렇게까지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기도 하다. 이루다는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한 약인공지능이며, 따라서 이루다의 발언들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 내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학습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루다가 쏟아낸 소수자 혐오발언은 기존에 없던 혐오를 인공지능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지닌 기존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그대로 투영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루다 사태와 관련해 알고리즘에 대한 점검을 넘어 사회 전반적인 성찰과 제도적 대안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도적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과 인권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진전된 외국의 사례를 보면, 챗봇 외에도 인공지능을 통한 의사결정 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관련 가이드라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영국 공직생활윤리위원회는 2020년 인공지능과 공공표준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발간했고, 호주 인권위원회는 2019년 인권과 기술 토론서를 발간했다. 이 밖에 유럽평의회 및 유엔 등 국제기구들에서도 인권의 원칙을 준수하기 위한 인공지능 규범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의 가이드라인들은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원칙과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차별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통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있다. 바로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준수하라는 것이다. 가령 영국 공직생활윤리위원회 검토보고서는 “평등법은 특정 사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기에 데이터 편향을 방지하는 핵심적인 법적 안전장치”이며, 그러므로 “공공기관이 평등법을 준수하도록 지침을 개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제정된 차별금지법을 준수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과 차별의 문제에 대응하는 출발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 역시 이번 이루다 사태를 겪으며 언론 및 정치권에서 다시 한 번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20년 6월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평등법에 대한 의견표명을 한 이래 관련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든다. 우리는 언제까지 혐오와 차별 사건을 마주하며 차별금지법을 ‘준수하라’가 아닌 ‘제정하라’를 외쳐야 하는 것일까. 차별금지법을 기본으로 두고 여기서 더 나아가 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더 많은 평등과 반차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이루다 사태 이후 방송통신위원회는 이용자 보호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인공지능 윤리규범 등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재발방지를 위한 개인정보보호 관련 법정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적했다시피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문제들 중 특히 혐오와 차별은 사회 전반의 차별적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정부와 국회가 재발 방지 대안을 마련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에서 출발해 더 많은 평등의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 이번 이루다 사태가 남긴 이와 같은 사회적 과제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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