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뉘앙스] 누구나 누구에게 선생님

신형철 문학평론가 2021. 1. 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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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어 문화의 가장 큰 약점은 호칭일 것이다.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지독한 결점이다. 몇몇 기업에서는 수평적 소통을 위해 이름이나 별명 뒤에 ‘님’을 붙여 부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가족과 친구가 아니라면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상호 지위 관계를 표시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낯선 사람과 소통을 시작할 때는 이름을 모를뿐더러 서로 높낮이를 정하기도 어려우니 호칭을 택하기 더 어렵다. 집배원, 택배노동자, 경비원, 환경미화원, 요양보호사, 종업원 등은 호칭이 아니라 명칭이다. 여기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어색하게도 느껴진다. 아저씨, 아줌마, 이모, 저기요, 라고 부르면 미안해지지만, 높여 불러보자니 마땅한 말도 없는 데다 과공비례(過恭非禮)가 될까 주저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같은 한국어 문화권이지만 북한에는 ‘동무’라는 대안이 있다. 그러나 분단 이후 북에 ‘인민’이라는 말을 빼앗겼듯이(혹은 버렸듯이) 동무 역시 그렇다. 설사 ‘동무’가 그 불온한 뉘앙스를 털어내게 된다 하더라도 이 호칭을 사용하자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어 사용자들이 호칭에 민감한 것은 위계질서의 사다리에서 각자의 위치가 호칭을 통해 적절히 배치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실제보다 낮추기는 미안하지만 더 높이면서 손해 보기는 싫은 것이다. ‘동무’라는 호칭은 섬세히 고려돼야 할 그 차이를 없애기 때문에 거부될 것이다. 다수의 한국어 사용자들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명제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칭은 그것 속에 스며 있는 세계관과 함께 바뀔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 세계관의 한 양태는 ‘능력주의’다. 그러나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주장은 50년 전에 존 롤스에 의해 이미 제기됐다. 능력은 ‘재능’과 ‘노력’으로 구성된다. 재능은 하필이면 내게 주어진 우연한 선물(gift는 재능이자 선물이다)이어서 공동 자산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노력 또한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모든 노력이 다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우연적인 데가 있다. 그렇다면 성공할 만한 사람을 모두 끌어내리자는 것인가? 아니, 여기서는 무조건적 평등원칙이 아니라 조건적 차등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능력에 힘입은 성공은 장려되고 평가돼야 한다는 것, 다만 그 성과가 과잉 보상일 때 그것이 공동체로 환원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라는 매트릭스 나오면
호칭 문제도 달리 보일 수 있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모두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보자

능력이 운(우연)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는 소수의 사람은 자신의 성공으로 얻은 보상을 운 나쁜 이들과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직업 간 소득 격차가 지나치게 큰 사회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죽어라 일해도 가난을 못 면하는 ‘워킹 푸어’의 현실을 취재한 명저 <노동의 배신>(2001)의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소득자가 저소득자에게 느껴야 할 것은 수치심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누군가 터무니없이 덜 받고 당신이 그만큼 더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하향적 수치심’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자신의 성공을 축하하느라 바쁜 사람은 하향적 수치심이라는 말이 날강도처럼 보일 것이다. ‘재능도 없으면서 노력조차 안 하는’ 이들이야말로 ‘상향적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하향적 수치심까지는 바랄 것도 없이 그저 능력주의라는 매트릭스 바깥으로 나오기만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월한 분과 열등한 놈이 있는 게 아니라, 운 좋은 사람과 운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누구도 믿지 않는 위선적인 헛소리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가 된다. 법조인이 법리에 밝은 것처럼 경비원은 건물 관리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의사만이 아니라 마트에서 퇴근하면 육아도 해야 하는 워킹맘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의 재능이 있고 비등한 노력이 있다. 여기에는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득의 격차가 있을 뿐이다. 하필 특정한 재능과 노력에 더 많은 보상을 지불하는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 역시 우리 모두의 우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호칭 문제도 달리 보일 수 있다. ‘동무’도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선생님’이 낫겠다(이 호칭이 이중 높임이라는 건 일단 차치하자). 이미 쓰고 있지만 더 전면적으로 사용했으면 싶다. 선생(先生)이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겠는데, 단지 연장자라는 뜻으로 말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새기면서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낸 그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 판사에게 식당 종업원은 선생님이고 의사에게 아파트 경비원은 선생님이다. 누구나 다른 누구에게 선생이다. 일단 선생님이라 부르고 나면, 최소한 반말을 하거나 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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