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곧 생존'인 한국 직장인에 "스스로를 긍정하라" 응원 메시지
[경향신문]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바닷가 시골마을. 젊은 사람들은 아이들 대학 진학을 위한 위장전입 목적이 아니고서야 살지 않는 곳이다. 아마도 서울 한복판 대기업 빌딩에서 근무했을 정은(유다인)의 새 출근지는 이 시골마을이다. 1년만 하청업체에서 근무하고 복귀하라는 것이 회사의 지시다. 사실상 해고 통보에 가까운 발령이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무표정에 창백한 얼굴의 정은이 캐리어를 끌고 시골마을 밤거리에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은이 근무해야 할 하청업체는 송전탑 수리를 맡고 있는 지방사무소다. 소장 한 명, 수리공 세 명이 있는 이 사무소에서 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회사는 정은에게 인사고과 D등급을 준 후 ‘합법적으로’ 해고할 계획이다. 정은은 자신이 여기서도 쓸모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송전탑 수리법을 익히기 위해 퇴근 후 텅 빈 작업장에서 설명서를 보며 공구와 씨름한다.
이태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실제 있었던 노동 관련 사건이다. 지난 19일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사무직 중년 여성이 갑작스럽게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됐고 그곳에서 버티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됐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는 부당노동 현장 고발에 그치지 않는다. 한층 더 깊숙이 들어가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직업이란 무엇인가”이다.
사무소에 오기 전, 정은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일했다. 보수적인 회사에 몇 안 되는 여자였고, 학벌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남자 동기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수시로 코피를 쏟으며 야근을 했다. 여자 동기들에게 정은은 “전설이자 희망”이었다.
하청업체에서 만난 송전탑 수리공들에게 직업은 생존의 문제다. 이름 대신 ‘막내’로 불리는 한 수리공(오정세)은 세 딸을 기르기 위해 수리공 일 외에도 여러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은이 막내에게 “열심히 일하면 뭐합니까, 이렇게 대우도 못 받으면서”라는 날선 질문을 던졌을 때 막내는 “(일하다 사고 나면) 34만5000볼트(V)에 한 방에 가거든요,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 것은, 해고예요”라고 답한다. 막내의 직업에는 본인만 아니라 딸들의 생계가 걸려 있다.
각각의 개인에게 직업의 의미는 다를지언정, 모두 직업을 잃지 않기 위해 절박하다. 이 감독은 “저도 직장을 다닌 적이 있는데, 직장에 오랫동안 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직장이 나의 삶이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현대사회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직업이 곧 생명이 되는 그런 지점을 영화에 녹이고자 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직업이 나에게 그토록 큰 의미라면, 직업을 잃게 되거나 직장에서 함부로 대할 때 내 삶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 답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정은이 보여주는 행동과 영화 제목에 담겨 있다. 이 감독은 “정은이 깊은 늪 같은 데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인간으로서 어떤 첫 마음을 낼 것인가를 생각해봤다”며 “(답은) 자신에 대한 긍정성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제목은 “사회가, 조직이 불합리한 대우를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겠다. 내가 내 스스로를 긍정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는 오는 28일 개봉한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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