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문화·사회 변화 주도 못했고 검열이 지배한 역사였다"

박성준 2021. 1. 2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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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70년사' 통렬한 자기 비판
해방 뒤 원술랑·뇌우 등 일시 호응
차범석·오태석 등 작가 발굴하기도
유신독재땐 계몽사극 관의 들러리로
민간 동인제 극단들 전성기와 대조
MB때 법인화.. 정권에서 일방 추진
박근혜정권땐 블랙리스트사태 오욕
정치로부터 진정한 독립 갈길 멀어
김광보 예술감독 "신뢰 되찾을 것"
떼도적(2005)-독일 문호 실러 서거 200주기 기념 대규모 공연. 국제 실러 페스티벌 폐막작으로 독일 만하임에서도 공연.
“되돌아보면 국립극단이 한국 연극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70년의 대부분 동안 한국 연극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하지도 못했으며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주도하지도 못한 채 연극계 한쪽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국립극단 70+ 아카이빙’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값진 건 그만큼 드문 일이어서다. 국립극단이 최근 펴낸 70년사 ‘국립극단 70+ 아카이빙’은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채워져 있다. 오랜 역사 동안 쌓은 공과가 작지 않은 데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라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스스로 허문 업보가 크기 때문이다.

◆ 국책연극, 아니면 반공극, 아니면 새마을 연극

1950년 ‘원술랑’을 무대에 올리며 창단된 국립극단은 연극 평론가 8인으로 70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어제와 오늘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3년에 걸쳐 작성된 70년사는 ‘어느 시기 무슨 공연이 있었다’식의 연대기가 아니라 중요한 변곡점을 짚어내고 그 안에서 국립극단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창단 직후 ‘원술랑’, ‘뇌우’ 공연이 해방 후 혼란과 가난에 시달리던 관객에게 일시 호응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곧 열기가 식어버렸고, 피란 시절이나 4·19혁명 후 국립극단은 사회 변혁과 동떨어진 레퍼토리 선정과 공연활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 후로 차범석·노경식·천승세 등 몇몇 사실주의 작가들과 오태석을 발굴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했다. 1970년대에 연극계가 예술적으로 활기를 띠었을 때 그 기운에 동참하지 못했으며, 유신 독재가 심화하면서 남산으로 물러나 대형 계몽 사극을 공연하는 등 관의 들러리로서 무력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성웅 이순신(1973년)’으로 대표되는 ‘국책연극’은 독재정권에 복무했던 국립극단의 오욕이다. 군사정권 시절 문화부 과장급이나 퇴역 대령이 국립극장장을 맡으며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민족정신을 발양하는 역사극, 아니면 반공극과 새마을운동 연극이었다. 문화부 장관이 리허설에 와서 작품을 대폭 수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국립극단에 주어진 책무는 ‘국시에 적합한 창작 희곡의 상연’.
뇌우(1950)-창단 기념 두 번째 공연으로 혼란스러운 중국 근대사 두 가족 이야기.
괴테의 파우스트(1984)-독일 연출 디터 기징 공연으로 당시 역대 최다 관객 모은 화제작.
반면 민간 연극계는 70년대부터 극단 실험극장, 동인극장 등 동인제 극단들이 전성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소극장과 민간 극단이 번성하면서 역동적인 기운이 가득했으나 국립극단은 80년대 중반에야 국책연극 풍토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국적 전통이 살아있는 연극, 고정 레퍼토리 시스템, 명작 만들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제법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2002년 초대 예술감독 김철리 이후 2004년 이윤택 예술감독, 2006년 오태석 예술감독 체제로 이어지면서 그나마 새로운 활기를 얻고 명작 레퍼토리 구축과 신작 개발, 실험을 조화시켜 나갔다. 외형 역시 김대중정부 때 책임운영기관으로, 다시 이명박정부(2010년) 때 법인으로 변하면서 2015년 명동예술극장과 합병되는 길을 걸었다. 이러한 외형 변모는 대체로 연극계나 국립극단 의견 수렴 없이 정권에 의해 일방 추진됐다. 이명박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연극인이었던 유인촌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진 법인화 과정은 초라했다. 남산 국립극장을 쫓기듯 나와 서울역 뒤편 옛 기무사령부 수송대 부지에 번지수도 없던 허름한 가건물을 극장으로 개조한 게 지금 길가 차 소리, 경적 소리가 그대로 객석에 전달되는 국립극단 현주소다.

◆검열의 역사와 참된 반성

국립극단의 현재 모습은 2010년 법인화에 이어 2015년 전속단원을 해산하고 시즌 단원제를 시행하면서부터다. 사회 민주화가 성숙했고 문화 저변도 넓어진 시대였지만 국립극단 활동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다. 극장이 3개나 되면서 공연 물량은 많아졌는데 대부분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졌고, 외국 작품·외국인 연출이 너무 많으며, 우수한 신작이 없고, 젊은 작가나 연출을 기용한 공연이 절대 부족하다는 비판을 수년 전까지 받았다.

“재단 법인화 이후만 보더라도 ‘삼국유사 프로젝트’부터 ‘한민족 디아스포라전’까지 다섯 차례의 야심 찬 기획 시리즈를 통해 총 26편 신작을 생산했는데 이 중 재공연된 경우는 지금까지 겨우 한 작품이다. 한 번 공연한 작품들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레퍼토리화가 가능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꾸준히 갈고 다듬어야 한다.” (김미도 연극평론가)

2013년 박근형 연출의 ‘개구리’ 검열 등 박근혜정부 블랙리스트 사태는 국립극단이 정권의 검열 하수인 역할을 거부하지 못한 오욕을 남겼다. 70년사 편찬위는 “블랙리스트 실행기관으로까지 전락했던 국립극단 행태는 국립극단 70년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국립극단 70년은 애초부터 정부 산하단체로서 검열이 지배하는 역사였고, 그 정점으로 드러난 것이 블랙리스트 사태였을 뿐이라는 게 70년사 편찬위가 내린 진단이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립극단은 두 차례나 연극계와 피해자들에게 사과했지만 외풍에 약한 모습은 그대로다. 근대 연극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무대에 올리려던 친일극을 논란이 예상되자 연출과 상의도 없이 성급하게 취소하는 등 창작의 자유를 지키려는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노이정 연극평론가는 “더 높은 표현의 자유에 도달하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연극인들과 공식적으로 소통의 장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블랙리스트 적용을 실행한 국립극단이 그 기억을 회피하려고 하면 그 기억은 히스테리화해 장기적으로 침잠될 우려가 크다. 70년의 역사를 맞도록 정치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해왔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고 비판했다.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국립극단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김광보 국립극단 신임 예술감독. 국립극단 제공
◆김광보 신임예술감독 “신뢰를 회복하겠다.”

연출가 김광보는 박근혜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서 ‘좌성향’으로 분류돼 2015년 국립극단 낭독공연 연출이 취소됐던 피해자다. 그런 그가 지난해 11월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됐다.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18일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김 예술감독은 3년 임기 중 추진할 사업으로 가장 먼저 블랙리스트 사례집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예술감독은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사회적 기억을 위해서 사례집을 만들겠다. 이것은 그냥 책 한 권이 아니고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목소리”라고 설명했다. 김 예술감독은 연극계와 소통도 강화할 방침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립극단은 우리 연극인들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또 심리적으로 보다 안전하고 창의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행위는 어쩌면 그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극대화시켜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누구나 자유롭게 예술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강화하고,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하겠습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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