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묻고, 여성이 답하는' 자매들의 서사가 몰려온다
새해 벽두부터 출판계에 한층 더 강력하고, 다양해진 ‘허스토리(herstory)’가 몰려 들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의 체력 단련에 힘쓰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언니’들의 서사가 여성 에세이의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올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끄집어내, 여성들이 직접 묻고 답하며 소통과 연대의 장을 키워가는 ‘자매’들의 서사가 치고 나오는 분위기다. 밀레니얼 세대 담론에서도 비껴 있던 90년대 여성부터 낯설고 먼 변방의 존재였던 탈북 여성, 굴곡진 삶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여성 농민, 대상화됐던 여성들의 몸을 다룬 이야기까지. 인터뷰와 구술 형태로 묶인 다양한 여성 서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80년대생 언니를 일으킨 90년대생들의 응원
요새 어딜 가나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려는 시도들은 넘쳐 난다. 하지만 ‘90년대 여성’을 따로 떼어내 조명하려는 노력은 드물다.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한겨레출판)은 그 틈새를 메워주는 책이다. 1984년생 유선애 작가가 인터뷰한 90년대생 여성 10명의 라인업은 ‘핫’하다. DJ 예지, SF소설가 김초엽, 뮤지션 황소윤, 유튜버 재재, 다큐멘터리 감독 정다운, 배우 이주영, 사이클 국가대표선수 김원경, 모델 박서희, 영화감독 이길보라, 작가 이슬아까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들을 작가는 자기 삶의 ‘단독자’라 부른다. “누구처럼 되어야 하는 삶”을 거부하고 “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오늘을 내일처럼 살아가는” 결연한 90년대생들을 보며, 80년대생 언니는 “덕분에 강해졌다”고 고백한다. 응원은 작가에게만 가 닿은 건 아닌가 보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벌써 3쇄를 찍었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20대(58.4%), 30대(25.1%) 여성 독자들의 지지가 압도적이다.
비슷한 시기 출간된 ‘내일을 위한 내 일’(창비)은 먼저 일하고 있는 선배 여성들이, 미래의 일터 동료인 여성 청소년들에게 건네는 진로 가이드이다. 일하는 여성들에게 통찰력 있는 조언을 건네온 이다혜 작가가 영화 제작사, 배구 훈련장, 커피 연구실 등 7명의 여성들의 일터를 찾아가 구체적인 일의 풍경을 전한다.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는 도식적인 팁보다는, “안 되면 되는 길로 간다”(정세랑 작가) 등등 현실감 넘치는 당부와 조언이 든든하게 다가온다. 청소년들을 타깃으로 기획됐지만, 일을 하고 있거나, 잠시 쉬고 있지만, 찾고 있는 여성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소외된 여성의 몸과 잊힌 생애를 끌어올리다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남성에 의해,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타자화됐다. ‘말하는 몸’(문학동네)은 다르다. 노동운동가 김진숙,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국회의원 장혜영 등 각계각층 다양한 삶의 이력을 지닌 여성 88명이 자신의 몸을 직접 이야기 한다. 동명의 팟캐스트가 모태가 된 책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중복될 거란 걱정이 무색하게, 여성들의 몸은 저마다 무수한 이야기를 뿜어낸다. 평생 육체노동자로 일하며 세 아이를 키운 미싱사 김명선에게 몸은 “유일한 재산”이며, 학교 밖 청소년 정김의에겐 “똑같이 꾸미고 화장해도 공부를 못하면 노는 애의 몸”이었다. 억압받던 몸으로 살아온 여성들은 인터뷰를 통해 고통과 억압, 해방을 동시에 경험한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유지영 저자는 “질문의 형식을 빌려 그들에게 내 삶을 건넸고, 대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내 안 깊숙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개별적 여성의 몸의 이야기들이 공명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전체 서사로 확장된 셈이다.
소외된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도 두드러진다. 생(生)을 붙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탈북 여성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여다 본 인터뷰집 ‘절박한 삶’(글항아리)은 학술 연구 논문을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탈북 여성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더 많은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탈북 여성들과 특유의 '자매 케미'를 선보였던 두 저자들은 '북한언니들의 남한 에피소드'도 출간을 준비 중이다. ‘억척의 기원’(글항아리)은 가난과 폭력, 온갖 역경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는 나주의 두 여성 농민의 생애를 들려준다. 전작 '할매의 탄생' 등 나이든 여성들의 삶에 천착해 온 구술생애사 최현숙 작가는 차기작으로 여성 노숙인들의 삶을 파고들 계획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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