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차별에 대한 유쾌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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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잘 다녀왔느냐"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일상에서 인종적 편견이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이 구조화된 차별을 어떻게 낳는지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체화한다.
미국에 살면 제각각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태어난 게 범죄〉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코미디언의 책에 좀 더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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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잘 다녀왔느냐”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무엇보다 학위 과정을 한 게 아니어서다. 10년 만의 캠퍼스 생활은 즐거웠지만, 학교 안보다 바깥에서 배운 게 더 많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로 ‘인종’이라는 관점을 얻은 것도 그중 하나다. 인종이 다양한 나라에 살아보기 전까지 체감하지 못했던 점이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상점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문 앞에 계속 서 있거나 얼쩡거리지 말라는 경고 문구인 ‘No Loitering’이 벽에 쓰여 있었다. 괜스레 긴장됐다. 미국 경찰은 거칠기로 악명이 높으니까. 일행에게 물었다. “경찰이 여기 서 있지 말라며 신분증 달라면 어쩌지?” 상대가 농담조로 답했다. “괜찮아, 우린 아시아인이잖아.”
일순간 웃음. 곧이어 ‘아, 모두들 저 말(No Loitering)이 이미 누구를 향하는지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상대적으로 불심검문을 당할 확률이 높고, 그것이 큰일로 곧잘 비화하는 일은 흑인에게 자주 일어났다. 일상에서 인종적 편견이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이 구조화된 차별을 어떻게 낳는지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체화한다. 미국에 살면 제각각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태어난 게 범죄〉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코미디언의 책에 좀 더 눈길이 갔다. 제목이 풍자나 비유가 아닌 저자의 삶 자체라는 걸 알게 된 덕이다. 극단적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1994년까지 존재했던 남아공에서는 다른 인종 간의 성관계를 법으로 금지했다. 당연히 관련 결혼과 출산도 불법이었다.
흑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1984년생 소년은 공공장소에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엄마의 감옥행을 가리켰다. 모자의 다른 피부색을 시비 거는 버스 운전자의 위협으로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다. 흑인도 백인도 아닌 그는 더욱 아웃사이더였다. 그렇게 자란 30대 중반 청년의 성장기는 인종차별의 가장 내밀한 보고서 구실을 한다. 피부 색깔에 따른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이들은 인종에 따라 무기력하거나 폭력적이다.
놀랍게도, 끔찍했던 지난 시간을 트레버 노아는 유쾌하게 고발한다. 동시에 따뜻하다.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자기 존엄을 지키며 웃긴다. 그 어려운 걸 전부 해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에게 깊은 연대감과 함께 질투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장기를 살려 2015년부터 미국 정치 풍자 뉴스 프로그램 〈더 데일리 쇼〉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또 반갑고 좋다.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접했으면 한다. 때마침 2016년 미국에서 나온 책(〈Born a Crime〉)이 4년 만에 번역되어 모국어로 책을 읽는 기쁨을 더한다.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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