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트럼프의 가장 큰 희생자는 트럼프 지지자다 / 슬라보이 지제크

한겨레 2021. 1. 2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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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0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함께 마린원을 타고 백악관을 떠나며 양 팔을 벌리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슬라보이 지제크 ㅣ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토머스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에서 대주교 베켓은 유명한 대사를 한다. “옳은 일일지라도 그 이유가 그릇된 것이라면 그것은 온전히 잘못된 일이다.” 자신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한 “옳은” 일들이 실은 성인으로 추앙받고 싶은 “그릇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내뱉는 대사다.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은 베켓의 대사를 상기시킨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는 마이크 펜스에게 대선 결과를 인증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미국의 선거 제도가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제적인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트럼프가 원한 것은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필사적으로 연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월6일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연방 의사당에 난입했다. 미국 선거 제도가 구조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불만을 반영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 자체는 충분히 옳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자본을 공격하라고 선동한 적이 있는가? 트럼프는 자본의 편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대변하는 듯한 몸짓을 취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대변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위험한 상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다.

트럼프는 포퓰리즘을 내세우고 있을 뿐 여전히 기존 체제 안에 있는 정치인이다. 그는 자신이 대의 민주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기존의 포퓰리즘(이를테면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기존 지배체제를 제거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늘날의 우파 포퓰리즘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자유주의적인 질서가 만드는 족쇄가 사라져 자신들이 비난할 대상이 없어지면, 자신들이 직접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자신들에게 어떤 프로그램도 없다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지배체제의 이른바 ‘딥 스테이트’를 공격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트럼프는 자신을 자유주의 지배체제를 공격하는 이로 포장한다. 이런 트럼프의 가장 큰 희생자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지지자들이다. 트럼프야말로 그가 말하는 포퓰리즘적인 대의의 반역자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결코 자신의 지지자들 편에 선 적이 없다.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했을 때도 그는 군중을 의사당으로 행진하라고 선동한 후 백악관에 들어와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봤을 뿐이다. 트럼프는 쿠데타를 원했을까? 아니다.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행위를 추켜세울 때조차 “이제 귀가해야 한다. 법과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나의 대선 압승이 인정사정없이 악랄하게 도둑맞았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면서 “이날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했다. 우리는 정말로 이날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그날은 트럼프 포퓰리즘의 기만성과 미국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함께 폭로된 날이기 때문이다. 1934년 진보적인 작가 업턴 싱클레어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갔을 때, 자본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싱클레어를 낙선시켰다. 심지어 할리우드의 자본가들은 싱클레어가 당선되면 영화산업을 할리우드에서 플로리다로 옮기겠다며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이런 것이 바로 미국의 가짜 민주주의다.

이제 미국은 다른 나라가 선거를 치를 때 아래로부터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는 방향으로 선거가 이루어지는지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선거 감시단을 보내는 외설적인 짓을 멈추길 바란다. 선거 때 다른 나라의 감시단이 필요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불량국가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상의 내전이 보여주듯, 미국은 언제나 큰 균열이 있는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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