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황제펭귄의 허들링 / 박주희

한겨레 2021. 1. 2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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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박주희 |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나라 사이를 오가는 걸음이 뚝 끊긴 탓에 소속 단체 일도 주춤한 상태다. 쓰지 않는 책가방을 모아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 보내왔는데 지난봄부터 보낼 길이 막혔다. 다행히도 상황이 그저 손 놓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가방 모아서 보내도 될까요?” 사실상 활동이 어렵다는 짐작은 하면서도 가방을 기부하려는 이들이 문의해온다. “지금은 국외로 가방을 보낼 수 없어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실어 묻고 답한다. 9년째 이어온 가방보내기 캠페인이 혹시 중단될까 걱정하며 다짐을 받듯 ‘상황이 좋아지면 가방 보내기 다시 시작하라’고 당부한다.

힘든 시기가 길어지면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학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연락해오는 횟수도 부쩍 늘었다. 폐업으로 재고로 남은 새 가방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전해달라며 택배로 보내온다. 생업을 접게 된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려는 이들에게는 힘내라는 말조차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이런 마음들이 통했는지 막막하던 지난해에도 몽골로 책가방 600개를 보낼 수 있었다. 해외봉사단으로 몽골과 인연을 맺은 이가 몽골 유학생을 통해 길을 찾았다. 덕분에 장애학교 두 곳과 오지 마을 아이들에게 책가방을 전할 수 있었다. 개수만 보면 예년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가방 전달 소식을 알리자 기뻐하고 응원하는 답장이 줄을 이었다. 얼마 전에는 경기도에 있는 한 교구업체에서 장난감 블록을 한 트럭 보내왔다. 근처 보육원, 아동 그룹홈, 공부방,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기관에 나눠 보내고, 멀리 광주에도 승용차에 한가득 실어 날랐다. 결혼이주여성 가정들, 이주민단체, 필리핀 공동체 몫도 챙겨두었다.

해마다 캄보디아에서 초등학교 운동회를 같이 열던 단체는 현지에 마을 도서관을 만드느라 바쁘다. 도서관에 필요한 책과 비품들은 알음알음 후원자들이 하나씩 맡는다기에 손을 보태기로 했다. 오랫동안 네팔 학교를 지원해온 지인 부부는 지난여름 동네에 작은도서관을 열었다. 곳곳에서 보내준 책들로 도서관은 풍성하게 채워졌다. 나라 사이에 오가는 길은 막혔어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웃과 나누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좀 다른 얘기지만, 동네에서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사이트의 나눔 게시판을 볼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곤 한다. 충분히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옷가지나 책이지만, 누군가에게 그냥 주고 싶다는 글들에서 훈훈함이 배어 나온다. 이렇게 힘들 때조차 선뜻 내것을 내놓고 낯모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성선설 쪽에 설득당하게 된다.

펭귄들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큰 황제펭귄은 산란기가 되면 천적을 피해 혹독하게 추운 곳을 찾아간다. 시속 100㎞가 넘는 눈폭풍이 몰아치는 영하 50도의 남극에서 펭귄들은 어떻게 생존할까. 황제펭귄은 독특한 군집행동으로 서로를 지켜낸다. 서로 몸을 맞대 큰 원형의 무리를 이루어 체온을 높이고, 눈폭풍이 불면 거대한 무리가 물결처럼 움직인다. 짧은 간격으로 바깥쪽 펭귄이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고, 안쪽 펭귄은 밖으로 나온다. 무리 안팎의 온도가 10도 이상 차이가 나니 바깥쪽 펭귄이 순차적으로 몸을 녹이도록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 없이 골고루 열을 나눠 모두의 생명을 지킨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음을 알고 서로 양보하고 의지하며 무리가 다 같이 살아남는 것이다. 황제펭귄의 ‘허들링’이다.

감염병의 대유행 속에서 사람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점점 더 또렷하게 벌어지고 있다. 팬데믹 덕에 더 많이 가지게 된 이들이 나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대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하다. 칼바람을 맞고 선 바깥쪽 펭귄을 밖으로만 밀어낸다면 안쪽 펭귄들끼리 오롯이 안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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