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이나 안타까움 없는 '유시민 사과문'의 의미

정지혜 2021. 1. 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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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갈무리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년여 전 자신이 제기한 ‘검찰 사찰 의혹’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인정하며 사과했다. 22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에 게시된 그의 사과문은 곧장 큰 화제가 됐다. 야당과 일부 시민은 “진정성 없는 사과”라며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라”고 맹비난했고, 또 다른 이들은 “합리적 의심을 했지만 사실이 아닌걸로 밝혀진 데 대해 사과한 것은 옳았다”고 유 이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 논쟁화를 피할 수 없는 이번 사건에 대해 소모적인 갑론을박보다는 유명세와 권위를 갖는 사회 지도층의 사과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볼 만하다. 인물이든 조직이든 기득권에 속하는 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이나 해명 아닌 사과문을 작성하는 일 자체가 아직은 흔한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과의 법칙’ 같은 게시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인기를 끌까.

그동안 정치인들의 사과는 ‘안 한만 못한’ 것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이들도 사람인 만큼 실수나 망언 등을 할 수 있지만 부적절한 사과로 점수를 더 깎아먹은 사례가 많다.

“아픔을 드렸다면,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이 부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다”는 ‘(조건부) 유감 표명’형이 대표적이다. 유감이란 단어가 애초에 사과가 맞냐는 지적부터 ‘내가 이렇게 해서 잘못했다’가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유감’이라는 조건까지 달아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다. 사전 정의로 유감은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은 느낌’이지 발화자가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한 부분에 대해 안타깝다”고 하는 것 또한 사과로 볼 수는 없다.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도 허다하다. 즉각 사과를 하지 않으려다 결국 일이 커지면 뒤늦게 “생각이 짧았다”는 식으로 입장을 바꾸는 식이다. 뒤늦은 사과나 인정에는 그만큼 진정성이 퇴색되기 마련이다.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이 밖에 사과를 하자마자 입장을 바꾸거나 언행일치 되지 않는 행태로 진정성을 의심받고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다.

이번 유 이사장의 사과는 어떨까. 일각에서는 “기회주의적으로 취한 행동”이라거나 ”무책임하게 논란을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다냐“는 지적이 나왔다. 국민의힘은 “뒤늦은 사과에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거니와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지금이라도 허위사실을 유포한 근거와 정보 출처를 밝히고 이사장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유 이사장 스스로 사과문에서 밝힌 대로 이 같은 비판은 그가 감수해야 할 몫이다. 다만 이전에 있었던 유수한 기득권의 사과에 비해 이번 유 이사장의 사과문 자체는 성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과문에서 “누구나 의혹을 제기할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경우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저는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이어 “무엇보다 먼저, 사실이 아닌 의혹 제기로 검찰이 저를 사찰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검찰의 모든 관계자들께 정중하게 사과드린다”며 “사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책임 추궁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또한 “저는 비평의 한계를 벗어나 정치적 다툼의 당사자처럼 행동했다”며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 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단편적인 정보와 불투명한 상황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해석해, 입증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고 충분한 사실의 근거를 갖추지 못한 의혹을 제기했다”며 “누구와도 책임을 나눌 수 없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이 부끄럽다”고 밝혔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상세히 쓰고 인정한 것은 물론 명확한 사죄 표현, 누구에게 사과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표기돼 있다. 그가 어떠한 의도로 사과문을 게재했든 간에 형식과 내용 면에서 성의 있는 사과를 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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