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하니 코로나..잃어버린 청력과 무대가 남긴 것
엄마와 아빠가 영영 갈라섰다. 엄마는 고사리 같은 내 손에 포스트잇 한 장을 쥐여줬다. 영어로 적힌 이메일 주소였다. 영어를 읽지 못해도 그 한 줄이 전부라는 것을 알았다. 이메일 주소를 담임선생님이 쳐주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썼다.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몰랐다. 엄마와 나만의 비밀이었다. 엄마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손에 쥐고 다니던 꾸깃꾸깃하던 포스트잇을 잃어버렸다. 그날 밤, 푹신하지만은 않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오지 않을 아침을 기다렸다. 엄마의 말을 잃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할머니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할머니는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줬다. 엄마는 새아빠를 데리고 왔다. 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탔다. 서점에서 책을 선물 받았다. 만화책 ‘메이플스토리’였다. 그 이후 엄마는 종종 학교에 소포로 메이플스토리를 보냈다. 매달 신작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부터 소포가 오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왜 메이플스토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신권을 사줬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아마 모를 것이다. 아빠는 1997년 두레극장에서 연극 ‘어린왕자’로 데뷔 했다. 20년 넘게 조종사·복서·성직자 등을 연기하면서 어떤 날은 온화한, 어떤 날은 거칠고 섬뜩한 아빠로 가면을 벗지 못한 채 집에 들어왔다. 아빠는 초등학생인 아들과 놀아주면서 단 한 번도 져준 적이 없다. 매번 져서 분했지만, 어른스러운 것 하나만으로는 아빠를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빠가 내게 온전히 준 것이 있었다. 연극이었다.
첫 연극 데뷔작으로 부모를 살해한 소년을 연기했다. 2017년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재학 중이던 22살 때였다. 고교생 이모 군의 존속살해 사건을 재해석한 연극 ‘손님들’의 주연이었다. 멍울진 아픔을 안고 희망을 좇는 소년을 상상하며 배역에 몰입했다. 무대에서 땀을 쏟고도 소년을 씻어내지 못한 채 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영혼이 새어나가며 소진되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배역과 거리를 두지 않았던 아빠는 “무대에 소년을 털고 오라”고 말했다.
연극을 마치고 2019년 군대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체력왕’, 부대에서 ‘철통독서경영대회’ 상장을 휩쓸 정도로 순탄하게 적응했지만, 그해 겨울 청력이 급격히 악화됐다. 11월 사격 훈련 때 쌓여있던 탄약을 소진하기 위해 한 번에 200여 발을 쐈다. 귀마개를 착용했지만 총알이 총구를 뚫고 나갈 때마다 ‘삐’하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자고 일어나도 이명(耳鳴)이 없어지지 않았다.
군의관은 ‘돌발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곡괭이질 같은 높은 음역대의 소리가 반복되면 고막이 욱신거렸다. 스테로이드 약물을 복용하면 2명 중 1명은 완치된다고 했다. 50%의 확률에 들지 못했다. 가늘고 날카로운 쇳소리를 배경음악처럼 깔고 살게 됐다. 해가 넘어가면서 전역을 기다렸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먼저 왔다. 외출과 휴가가 줄줄이 취소됐다. 유격과 혹한기 훈련도 밀렸다
2020년 7월에 조기 전역했다. 그간 연기됐던 휴가를 쓰고 부대 복귀 없이 제대했다. 그해 9월 낭독 공연에 설 계획이었으나 11월로 연기되더니 급기야 취소됐다. 무대 스피커가 손상된 청력을 자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나마 운이 좋아 한국소극장협회 방역안전지킴이로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르지 못할 무대를 볼 때면 지독하게 배역에 빠져들었던 옛날이 떠올랐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건 아니었다. 2년 전 연극 손님들의 관객이었던 독립영화 감독이 대본을 건네며 주연을 제안했다. 피아노 치며 축가를 부르는 회사원 역할이었다. 평생 음치이자 박치로 살아온 것을 통탄하며 피아노 전공자인 지인의 연습실에 틀어박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부터 배웠다. 체중도 10㎏ 감량했다. 제법 호리호리했던 모습을 기억했던 감독은 근육을 한껏 부풀린 채 전역한 포병을 보자 적잖이 당황했다. 매일 중랑천을 내리 달리며 몸의 부피를 줄였다.
작년 11월 영화 촬영 시작과 함께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다.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이 방역 문제로 수정됐다. 학생들로 꽉 찬 버스에서 여자 주인공에게 바짝 기댄 남자 주인공이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흘리는 장면이었지만, 모든 단역 배우를 빼는 것으로 변경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어린 배우들을 좁은 공간에 방치하는 것은 어쩐지 반(反)인륜적으로 느껴졌다. 공항에서 촬영해야 하는 장면도 코로나로 인해 허가가 나지 않아 삭제됐다.
영화를 촬영했던 한 달. 철탑처럼 견고했던 정체성을 깨부수고 다시 쌓아올렸다. 익숙했던 연극 발성을 영화 주인공에 맞는 나긋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바꿨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굳어버렸던 손가락은 상앗빛 건반을 활주할 정도로 제자리를 찾았다. 2020년 12월 5일 마지막 촬영을 마친 날 집까지 걸어갔다. 짙은 우물 같은 밤하늘을 보자 “드디어 끝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처럼 영화도 취소될 수 있다는 불안이 부슬비처럼 천천히 씻겨 내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피아노를 가르쳐준 지인에게 손 편지를 썼다. 군대를 전역하고 마음껏 보고, 놀고,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섬과 섬을 표류하며 지평선이 끊긴 대서양을 떠돈 것만 같다. 숱한 단절에도 전역 후 주어진 삶은 덤 같았다. 새로운 기회와 인연으로 풍족함을 누렸다. 올해 사람들의 섬을 찾고 싶다. 무대에 서고 싶다.
언젠가 “연극이 뭐냐고”고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닿는 것.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로 듣고 마음을 다하는 것. 온전히 다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간직한 채 연극을 다시 찾고 싶다.
박로명 기자/dod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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