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극 전성시대가 활짝 열릴까
'사극의 탈역사' 어디까지 계속될지 주목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다시 사극 전성시대가 오는가. tvN 《철인왕후》와 KBS 《암행어사》가 모두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하지만 퓨전을 넘어 시공간의 공식까지 깨는 사극의 일탈은 기대와 동시에 우려를 낳고 있다.
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는 시작부터 8%(닐슨코리아)의 시청률을 냈다. 이렇게 된 건 드라마 시작 전부터 예고편의 파격적인 영상들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저 세상 그 놈, 이 세상 중전이 되다'라는 문구와 함께 중전 역할을 맡은 신혜선의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말과 행동들은 우리가 사극이라는 장르에서 볼 수 없었던 '저 세상 텐션'을 보여줬다. 궁궐에서 맨발로 뛰어다니고, 왕에게 반말을 하며, 한복을 입고 있는 중전이 가랑이를 쩍 벌리며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신을 확인하고 경악하는 장면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사극이 가진 엄숙함을 현재의 바람둥이가 타임리프해 중전의 몸으로 들어갔다는 설정으로 해체해 버린 그 장면들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자극'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꼈다. 우리가 흔히 "지금이 조선시대야?"라며 현재에도 시대착오적인 일들을 꼬집고 비판하는 그 지점을, 이 드라마는 코미디 사극 판타지로 실제 재연하고 있어서였다.
《철인왕후》, 사극인가 장르물인가
하지만 이런 파격은 곧바로 해체의 위기에 처한 사극이 가진 역사의 반격을 맞이하게 됐다. '역사 왜곡' 논란이 터진 것. 파격적인 이야기로 애초 사극이 아닌 장르물로 접근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가, 굳이 사극의 틀을 고집하면서 생겨난 파장이다. 철종(김정현)과 철인왕후(신혜선) 그리고 순원왕후(배종옥) 같은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이름이 사용됐고, 그러자 역사의 엄밀한 잣대가 이 파격적인 코미디에 드리워졌다. "조선왕조실록도 한낱 찌라시네" 같은 대사는 역사 왜곡 논란의 도화선이 되었고, 실존 인물 희화화는 후손들의 반발을 낳았다. 부랴부랴 제작진은 사과하고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집안을 각각 안송 김씨, 풍안 조씨로 수정했지만 이렇게 한번 엇나간 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물론 《철인왕후》는 그 후로도 시청률이 계속 상승해 현재는 13.2%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시청률 상승이 이 프로그램에 대한 호감의 작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결국 시청률이란 파격과 자극에 의해 오를 수 있는 것으로 그 작품의 호감이나 완성도의 지표로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철인왕후》가 장르물을 섞어 열어놓은, 조선시대라는 시공간의 특성(계급 구조나 신분사회 등)까지 파괴한 사극의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다. 《철인왕후》를 사극으로 보면서, 이제는 사극 역시 역사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이 작품은 그저 장르물이라 치부하면서 사극은 퓨전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룰은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사극의 탈역사'는 이른바 퓨전사극이 등장하면서부터 지금껏 계속 이어져온 일이다. 과거 MBC 《조선왕조 500년》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정통사극을 선보이다, 이병훈 감독의 《허준》 《상도》 《대장금》 《이산》 《동이》로 이어지는 퓨전사극의 시대가 열렸고, 그 흐름은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작품들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조금씩 '상상력이 더해지기 시작한' 사극은 천성일 작가의 《추노》나 진수완 작가의 《해를 품은 달》 그리고 김원석 감독의 《성균관 스캔들》로 이어지는 장르사극으로까지 확장됐다. 정통사극이 역사에 충실하다면, 퓨전사극은 역사와 상상력의 균형을 중시하고, 장르사극은 역사보다는 과거의 시공간을 가져와 그 특별한 시대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풀어낸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사극은 이렇게 정통에서 퓨전, 장르로 이어지며 역사의 무거운 옷을 벗어온 흐름이었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를 벗어낼수록 당장의 파격이 가져오는 주목과 재미는 생겼지만, 사극이라는 고유의 장르가 가진 힘이 빠지는 한계를 드러냈다. 사극이 가진 중요한 힘 중 하나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무게감에서 온다는 점은, 이를 벗겨내고 상상력으로 채움으로써 가벼운 재미만큼 잃게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줬다. 그래서 퓨전사극이 장르사극을 넘어 판타지사극으로까지 가게 됐을 때 시청자들이 다시 정통사극을 요구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정현민 작가가 쓴 《정도전》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고, 《녹두꽃》은 그 역사를 오롯이 담으면서도 백이강(조정석)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더한 정통에 가까운 퓨전사극이었다.
《달이 뜨는 강》 《조선 구마사》 등 다양한 사극 '대기 중'
그렇다면 올해는 어떤 사극들이 등장할까. 한마디로 정통과 퓨전 장르를 넘나드는 사극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방영되고 있는 《철인왕후》는 물론이고 KBS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이 모두 퓨전사극으로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전하고 있는 데다, 다양한 사극이 방영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이야기를 해석한 《달이 뜨는 강》이 역사에 상상력을 더한 퓨전사극의 맛을 보여줄 거라면, 악령과 맞서는 인간들의 혈투를 그린 한국형 엑소시즘 판타지 SBS 《조선구마사》는 장르사극의 맛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장태유 감독의 조선시대 여성 화사의 이야기를 그린 SBS 《홍천기》나 의빈 성씨 덕임의 일생과 정조의 사랑을 다룬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은 모두 멜로사극의 맛을 전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퓨전, 장르 사극이 출격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정통사극으로서 KBS 대하사극 부활에 대한 논의도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물론 제작비와 광고 수급의 문제 등이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공영방송으로서 정통사극에 대한 필요성은 어느 정도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얻는 사안이다.
물론 사극의 변신은 정통에서 퓨전, 장르, 판타지 순으로 역사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확장돼 왔다. 하지만 이미 이 모든 파격이 실험된 터라, 이제 어느 한 부류의 사극이 트렌드를 이루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됐다. 정통, 퓨전, 장르가 모두 혼재된 사극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청자들은 넷플릭스 《킹덤》 같은 장르사극과 《녹두꽃》 같은 정통에 가까운 퓨전사극을 저마다의 특징에 맞게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요해진 건 그 사극의 특징에 맞게 역사를 훼손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슬기로운 선택들이다. 《철인왕후》의 사례에서도 나타났지만, 이러한 파격적인 사극에 굳이 역사적 인물을 세워 혼동을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 역사냐 상상력이냐를 두고 정통사극과 퓨전사극 중 어느 쪽이 옳은 길인가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대신 정통이라면 정통에 맞게, 퓨전이라면 퓨전에 맞게 제대로 된 선택으로 역사와 극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이제 사극들이 당면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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