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찾아가겠다" 살인범이 유족에 보낸 공포의 편지 3장

이승규 기자 2021. 1. 23. 15: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건 블랙박스]
빌려준 5억 안 갚자 흉기로 31회 찔러 살해
"반성한다"던 가해자, 편지에는 "찾아가겠다"
검찰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엄벌 필요"
지난 2020년 9월 15일 가해자 A씨가 피해자 유족에게 보낸 협박 편지. 자신에 대한 탄원서를 독촉하고 유족을 찾아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독자 제공

지난해 9월 중순, 경북 경주에 있는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의 집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겉봉에는 경주구치소에서 수감 중인 가해자 A(62)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봉투를 열어 편지글을 읽은 피해자 B(67)씨 유족들은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우선 재판장에게 나를 용서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다려라” “그럼 나중에 감사 인사 하러 가겠다” “국내, 해외 어디로 이사 가든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추신에는 편지 수취인이자 A씨가 살해한 피해자 장남과 며느리 부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난 (두 사람의) 주민번호를 알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편지글은 끝났다. A씨가 보낸 또 다른 편지에는 “심부름센터 등 흥신소를 이용해 찾아가겠다”는 협박글이 있었다. 이 같은 협박 편지는 총 3차례 배달됐다. A씨와 살해된 B씨에겐 어떤 악연(惡緣)이 있었을까.

◇흉기에 수십 차례 찔린 요양원장

지난 13일 대구지법 형사12부(재판장 이진관)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검찰은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된 A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A씨는 지난해 7월 28일 경북 경주의 한 요양원 입구에서 요양원장 B씨를 흉기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대구지방법원/뉴시스

비극은 B원장이 A씨에게 거액을 빌리면서 시작됐다. 지난 2015년 B원장은 요양원 경영 사정이 악화되자 요양원 입소자의 아들인 A씨에게 총 5억 7300만원을 빌렸다. A씨가 아버지 사망 후 상속 받은 유산이었다.

A씨는 B원장에게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요양원 직원으로 고용할 것을 내걸었다. 매달 이자와 월급을 각각 지급해 달라고 했다. 원금은 2020년 1월까지 갚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B 원장은 A씨에게 이자와 월급을 제 때 지급하지 못했다. B원장 유족 측은 “여전히 경영 사정이 어려워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며 “채용된 A씨가 태업을 일삼았고, 요양원에 봉사하러 온 학생들에게 욕설을 하는 등 민원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2~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요양원 경영이 더욱 어려워졌다. A씨는 B원장이 돈을 갚을 의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6월, A씨는 B원장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5년간 쌓인 채권·채무 악연

A씨는 서울에서 흉기 2개와 가스총 등 범행 도구를 구입했다. 경주로 돌아온 뒤에는 요양원 주변을 답사했다. 요양원 문이 열리는 시간, B원장과 아들의 출근 시간과 동선(動線)을 파악했다.

/조선일보DB

사건 당일 오전, A씨는 요양원 앞에 차를 주차하고 B원장을 기다렸다. B원장이 요양원 출입문을 열고 출근하자 “요양원 통장 내역과 입소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B원장이 이를 무시하자 A씨는 품에 감춰둔 가스총을 발사한 뒤 흉기를 꺼내 B원장을 공격했다.

B원장이 비틀거리며 피하려 했지만, 공격은 계속됐다. A씨가 양손에 쥔 흉기 두 자루로 B원장을 찌른 횟수는 무려 31차례. 공격은 얼굴과 목 등에 집중됐다. A씨는 재판정에서 변호인을 통해 “한 번 찌른 뒤부턴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까지 밟았던 A씨가 범죄자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검찰은 무기징역 구형, 유족들 “추가 범행이 두렵다”

지난 13일 대구지법 재판에서 검찰은 A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며 “(피고인은)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며 “유족에게 피고인을 용서한다는 탄원서를 요청하고, 찾아가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점을 감안해 엄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A씨 변호인 측은 “피고인은 거액을 빌려줬지만 이자와 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요양원을 경매에 넘기려고 했지만 피해자 요청으로 이를 중단했다”면서 “이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고 망상에 시달리다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음주 운전과 무면허 운전으로 인한 벌금 이외에 형사 처벌을 받은 적이 없는 점 등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A씨는 재판정에서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평생을 반성하며 살겠다”는 말을 남겼다. A씨는 사건 당일 자수했고, 재판부에도 두 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하며 선처를 요구했다.

B원장 유족 측은 “A씨 추가 범행이 두렵다”고 했다. A씨가 B원장 장남에게 “반드시 찾아가겠다”는 편지를 쓴 날은 반성문을 제출한 지 불과 6일 뒤였다. 협박 편지 보내기를 멈춘 시점은 유족이 제출한 편지를 본 판사가 주의를 준 뒤였다. B원장 유족은 “자수를 한 것도, 반성한다는 것도 모두 어떻게든 형량을 줄여보기 위한 것이 아닌 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A씨에 대한 선고 공판은 다음 달 5일 대구지법에서 열린다.

지난 2020년 10월 23일 가해자 A씨가 피해자 유족에게 보낸 협박 편지. 자신에 대한 탄원서를 독촉하고 흥신소 등을 통해 유족을 찾아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독자 제공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