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콕 1년’에 지친 사람들… 슬기로운 ‘오프라인 생활’ [S 스토리]

권구성 2021. 1. 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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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택트 시대 우리, OFF로 돌아갈래
비대면 일상 속 커지는 ‘대면의 향수’
온종일 온 식구가 집서 ‘복닥복닥’
가족과 갈등 생기는 일도 잦아져
국민 94% “거리두기 피로감 누적”
방역 지키며 우리들만의 ‘집콕 탈출’
전시장 1시간 빌려 아이체험학습
일 들고 호텔로 출퇴근 ‘워캉스’도
슬리퍼 생활권에 집 주변 재조명
#1. “그동안 아이와 외출하는 걸 꺼렸는데… 저희만의 공간이라 안심했어요.”
 
주부 곽모(27)씨는 얼마 전 어린 딸(16개월)과 조카(5)를 데리고 경기도의 한 전시회장에 다녀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 우려로 지난해부터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했던 곽씨 가족에게는 아주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곽씨가 마음 놓고 아이와 전시회를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전시회장에 곽씨 가족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4인 이하 한 팀에게 1시간 동안 전시회장을 단독 대관해주는 형식으로만 예약을 받았다. 전시회장에는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과 볼거리가 마련돼 있어 곽씨와 아이들은 마음껏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귀가했다. 곽씨는 “아이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외출 자체가 쉽지 않아 아쉬웠다”며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걱정 없이 편하게 놀다 올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2. 몇 달째 재택근무 중인 정모(31·여)씨는 지난달 서울 시내 한 호텔의 ‘재텔(재택근무+호텔) 상품’을 이용했다. 원룸에서 혼자 사는 정씨는 1년 가까이 좁은 방에서 온종일 일하고 생활하는 게 매우 갑갑했다. 그러다 호텔에서 재택근무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품을 내놓았다는 소식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예약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호텔 룸을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정씨는 아침에 친구와 호텔에서 만나 노트북으로 일하고, 점심과 저녁 식사는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 그는 “당시에는 수도권 거리두기 조치로 카페 이용도 못 할 때였는데, 오랜만에 전망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하니 기분 전환도 되고 일도 더 잘됐다”고 말했다. 이어 “작년 내내 제대로 외식도 하기 힘들었고 여행도 못 갔는데 이런 식으로나마 잠시 집을 떠나니 마음에 있던 갑갑함이 좀 해소되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국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 꼬박 1년이 지났다. 최근 우리 일상은 ‘거리두기’와 ‘비대면’으로 요약된다. 외부 활동이 줄고 재택근무와 원격수업 등 온라인 시스템을 활용한 일상에 사로 잡히면서 활동반경은 사는 집의 면적만큼 좁아졌다.
하지만 익숙해진 ‘비대면’ 일상은 오히려 ‘대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많은 사람이 활동적이었던 일상을 그리워하면서, 방역수칙을 지키면서도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오프라인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타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단독 대관 시설을 이용하거나, 관광지가 아닌 ‘숙소 안’에서만 휴식을 즐기다 오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호텔로 출근해 일하고 휴식도 즐기는 사람이 늘면서 ‘일(Work)’과 ‘휴가(Vacance)’를 합친 ‘워캉스’라는 말도 나왔다.
서울의 한 호텔 홈페이지의 ‘재텔근무’ 상품 예약 화면. 홈페이지 캡처
◆집콕 생활 1년… “잠시라도 벗어나고파”

많은 이들이 길어진 비대면 생활로 인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22일 취업 포털사이트 인크루트에 따르면, 지난 6∼7일 성인남녀 837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코로나19 장기화로 피로감이 누적됐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94.1%가 ‘그렇다’고 답했다. 피로 누적의 주된 이유로는 ‘모임 자제’(12.2%), ‘마스크 착용’(12.1%), ‘거리두기’(8.9%) 등 제한된 외부 활동을 많이 꼽았다.

오랜 기간 주로 집 안에만 머물고 외출을 극도로 자제해 온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의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바깥 공기’를 쐬는 방법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인기를 끄는 곳은 호텔이나 펜션 등의 숙박업소다. 분리된 객실 공간 안에서만 놀면 타인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데다가 최근 여행업계 비수기로 투숙비가 낮아져 선호하는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숙박업소 자체가 여행 목적이 되는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직장인 김모(37)씨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혼자 호캉스를 떠난다. 부모님도 그럴 때가 있다. 매달 호캉스를 가는 것이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김씨와 부모님이 찾은 대안이다. 김씨는 “하루 세 끼를 모두 집에서 먹는 경우가 늘면서 가족과 갈등이 생기는 일도 잦아졌다”며 “평소라면 웃어넘길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잔소리를 하는 통에 가끔씩이라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자는 취지로 호캉스를 가고 있다”고 했다.
특히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집에만 머무르는 아이들의 놀거리와 문화생활을 어떻게 충족시켜 줄지가 큰 숙제다. 최근에는 수영장과 놀이시설 등을 객실 내에 갖춘 ‘키즈풀빌라’가 인기를 얻고 있다. 김모씨(37·여)네 가족도 분기마다 한 번씩은 아이를 데리고 그런 숙박시설을 찾는다. 김씨는 “밀접접촉자가 0명인 여행”이라고 말한다. 숙박업소에 도착하기 전 다른 곳은 들르지 않고, 여행기간 동안 ‘방 안’에만 있다가 숙박 일정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온다. 먹을 것은 미리 장을 봐서 싸가고, 중간에 식당이나 카페도 들르지 않는다. 김씨는 “최대한 타인과 안 마주치면서도 아이와 놀 수 있는 방법”이라며 “평소엔 거의 외출을 못 하는데, 숙소에 한 번 다녀오면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기분 전환이 된다”고 말했다.

긴 재택근무로 지친 직장인을 위한 재텔근무 상품도 인기다. 통상 호텔 투숙시간은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인데, 재텔근무 상품은 출퇴근 시간대와 마찬가지로 오전 8∼9시부터 저녁 시간대까지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숙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 투숙비보다 저렴하다.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30대 10명 중 7명은 평균 두 달에 한 번 호캉스를 즐긴다고 답했고, 20%가량은 호텔에서 재택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아예 호텔에서 장기간 투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수도권 호텔들은 최근 30일가량의 장기투숙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 호텔 관계자는 “멀리 여행을 못 가는 대신 장기간 호캉스를 즐기려는 수요가 있어서 이런 상품을 출시하게 됐다”며 “종종 문의가 온다”고 설명했다.
◆도심보다 동네, ‘슬세권’ 재부상

‘집콕 생활자’가 많아지면서 집 주변 동네도 재조명되는 경우가 많다. 동네를 벗어난 외부 활동이 제한된 사람들이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동네를 둘러볼 여력이 생긴 것과 무관치 않다. 자연스럽게 ‘슬리퍼를 신고 갈 정도 거리’의 세권을 뜻하는 이른바 ‘슬세권’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다.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 이모(31)씨는 매일 업무를 마치면 노트북을 덮고 집을 나선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단 채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향하는 곳은 집 근처 산이다. 헬스장을 못 가는 대신 산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씨는 “종일 집 안에만 있다가 산속 흙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이른바 ‘산스장’(산+헬스장)을 이용하는 이들이 늘면서 집 근처에 산책이나 운동을 할 만한 공간이 있는지가 삶의 질에 중요한 요소가 됐다.

올해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이사 갈 동네를 알아보는 직장인 박모(32)씨도 집 근처에 공원이 있는 지역을 찾고 있다. 현재 박씨가 사는 곳은 회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지만,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이런 조건들은 효용가치가 떨어졌다. 박씨는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집 근처에 공원이나 마트가 없어 갑갑하고 불편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예전에 집은 ‘잠을 자는 곳’이란 인식이 있어서 회사까지의 이동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지만 이제는 ‘생활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주거 환경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새삼 중요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지금의 비대면 상황은 개인이 원해서가 아닌 통제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1년간 쌓인 피로가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 피로감에 대해 스스로가 보상해주고자 하는 심리에서 취미활동을 찾거나 소비를 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잠시 스마트폰 끄고… ‘디지털 디톡스’ 하세요

직장인 조모씨는 최근 업무에 필요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제외한 디지털기기를 모두 중고장터에 팔았다. 코로나19로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지난해 태블릿PC와 스피커 등을 새로 장만했지만 이용하면 할수록 정신적·신체적 피로도가 높아진 탓이다. 조씨는 “처음에는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는 것이 즐거웠는데, 1년 가까이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허탈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며 “디지털기기를 끊을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 줄여보자는 생각에서 일부 기기를 팔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화하면서 디지털기기의 사용도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기기 과몰입과 의존도 심화 등 부작용이 잇따르자 ‘디지털 디톡스(디지털 유해성 해소)’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비대면 일상이 ‘뉴노멀 시대’를 열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디지털기기에 포섭된 생활에 무기력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22일 중독포럼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성인 101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스마트폰 사용이 증가했다’는 응답이 44.3%에 달했다. 이용이 늘어난 스마트폰 콘텐츠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채팅이 48.6%로 가장 많았다. 이어 뉴스(47.2%)와 쇼핑(34.6%), 사진·동영상(29%) 등 순이었다.

우울감은 디지털기기 의존도와 상관관계를 보였다. 우울감이나 불안감이 심각한 사람 중 스마트폰 이용이 ‘매우 늘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21.7%와 25.6%로,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우(15.2%·13.2%)보다 눈에 띄게 높았다.

반대로 디지털기기를 통한 시간 보내기가 무기력감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손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와 허만섭 교양대학 부교수의 ‘코로나19 확산 후 SNS 이용과 무력감·외로움 체감에 관한 연구’다. 대학생 14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시간 보내기’를 목적으로 SNS를 이용할수록 무기력감과 외로움의 체감 정도가 커졌다. 조사에 참여한 한 대학생은 “코로나 이후 심한 날은 하루에 유튜브를 10시간 본 적도 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나빠지는 느낌과 함께 두통, 피로가 몰려오고 우울증에 걸려버릴 것 같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유튜브를 자투리 시간에만 보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코로나19 확산과 맞물려 상당한 시간을 유튜브 시청에 할애하게 돼 사정이 달라졌다”며 “그러한 시청자들은 ‘자기효능감’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시간 배분 등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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