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늦겨울에 매화 찾아나서는 이른 발길.. 조선시대의 '호연지기' 생생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김예진 입력 2021. 1. 2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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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봄을 찾아 떠난다, 정선과 심사정
겸재 정선 ‘눈 내린 파교를 건너며’ 화면 좌측 상단에 ‘파교설후(灞橋雪後)’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맹호연의 고사를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제 따듯해질 일만 남았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는 말도 한다. 들을 때마다 어째서 ‘소’의 추위가 ‘대’의 추위보다 더 큰지 궁금해진다. 이는 24절기를 중국 황하 유역을 기준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무렵이 가장 춥다. 양력 1월 15일 무렵으로 대한보다 5일 정도 빠르다.

살면서 잊지 못할 겨울 날씨의 기억이 있다. 보고 싶은 전시를 찾아 맨해튼을 방문한 겨울날이었다. 오후가 되며 기온이 뚝 떨어졌고 눈발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눈은 급격히 쌓이다 어느새 무릎 근처까지 올라왔다. 뉴스에서는 얼마 뒤부터 통행 금지를 시작하겠다는 알림이 나왔다. 높은 건물 사이 좁은 도로에 쌩쌩 부는 바람을 맞으며 머물 곳을 찾았다. 손발의 시림은 고통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날의 기억을 뛰어넘는 추위를 얼마 전 경험했다. 소한 무렵 서울에 영하 15도 근처의 기온이 연일 이어진 때였다.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고 나섰지만 별로 소용이 없는 듯싶었다. 외출에서 차가워진 머리는 두통까지 동반했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며칠을 보내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잘 버티고 지나가면 이제 따듯해질 일만 남았다고. 그리고 한겨울 봄을 찾아 떠나는 그림을 떠올렸다.

#추위 속 봄을 찾아 떠나는 시인

한겨울, 봄을 찾아 떠나는 시인을 그린 그림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맹호연은 후베이 출생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王維)와 함께 손꼽힐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이름을 알렸지만, 일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속에 은거하며 살았다.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며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담은 시들을 남겼다.

그는 봄이 올 무렵이면 꼭 수도인 장안으로 갔다. 나귀를 타고 도시 동쪽의 파수(灞水)로 향했다. 거기에 놓인 다리 파교를 건너 산으로 들어갔다. 맹호연은 눈이 녹지 않은 설산의 상태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한 것은 매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꽃을 마중하는 일이었다.

맹호연은 매화를 찾아가며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쓸쓸해진 마음은 생각을 깊게 하였고 명구를 가져왔다. 정계(鄭綮)라는 시인은 신작의 소식을 묻는 사람에게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시흥(詩興)은 파교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나귀를 몰아가는 때라야 떠오른다.”

맹호연의 고사는 이렇게 후대의 문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들에게 이른 봄 매화를 찾아다니는 풍습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 동네 산 입구에는 매화를 찾으러 나선 이들이 몰렸다. 이러한 ‘파교설후(灞橋雪後)’의 모습은 조선에서 즐겨 그려지게 되었다. 그중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도 있다.

#정선의 ‘파교설후도’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그림에 새바람을 일으킨 화가다. 그는 1676년 아버지 시익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인근에서였다.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맏아들로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열정으로 그것을 지켰다. 덕분에 가까이에 사는 안동 김씨 명문가의 문하에 드나들게 되었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닌 영조의 총애도 받게 되었다.

그는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평생을 화가로 살았다. 이 과정을 통해 조선 그림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의 그림에서 벗어나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그는 중국 풍경을 상상해 그리는 대신 실제 조선의 산과 강을 방문했다. 한양 시내의 뛰어난 경치는 물론이고 금강산까지 몇 번이고 찾아갔다. 이 모습을 중국 화풍에 따라 그리는 대신 자기만의 화법으로 구사했다.

정선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는 ‘인왕제색도’다. 일흔여섯의 나이에 완성한 역작 중 역작이다. 비가 내린 뒤 젖은 인왕산의 모습을 그렸다. 인왕산의 너른 바위의 모습이 묵중한 필체와 대담한 배치로 드러난다. 실제 인왕산의 봉우리는 흰색이지만 정선은 그것을 검게 그렸다. 비가 온 후에 젖은 봉우리가 검은색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장면의 재구성과 변형으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도 했다.

‘파교설후도(灞橋雪後圖)’는 정선이 눈 내린 파교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저 멀리에 솟아 있다. 그 앞에는 그보다 더 가파른 벼랑이 보인다. 높은 파도와 같이 모든 것을 잡아먹을 기세다. 그 벼랑을 향해 한 남성이 나귀를 타고 가고 있다. 산들은 눈에 하얗게 덮였고 하늘은 어둑어둑하다. 눈이 한바탕 더 쏟아지기 직전의 모습 같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깊은 겨울 속으로 향한다. 과감한 생략과 강조로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백악산과 인왕산을 보며 자란 기세가 담긴 듯도 싶다.
심사정 ‘눈 속에 매화를 찾아’ 둥글둥글한 산의 형태와 구불거리는 필선이 인상적이다. 심사정 만년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심사정의 ‘설중매화도’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조선 후기 산수, 새, 꽃 등 다양한 소재로 활동한 화가다. 그는 1707년 아버지 정주와 하동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비와 관료를 대대로 배출한 명문가에서의 탄생이었다. 외가 역시 외할아버지가 승지를 지내는 등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친할아버지가 과거 시험 부정사건으로 귀양 가며 가세가 기울었다. 해배하여 돌아온 뒤에는 영조 시대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대역죄인 집안이 되었다.

심사정이 이러한 와중에 전력을 쏟은 것은 그림이었다. 그는 서너 살부터 사물을 그리는 법을 스스로 깨달았다. 10세 전후에는 비상한 자질을 바탕으로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몇몇 기록에는 심사정이 어려서 정선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그린 금강산도 중에는 정선의 영향을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기록이 간략하고 이후의 삶을 보아 사제 관계가 오래가지는 않은 듯 보인다.

심사정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에는 당시 새로운 화풍이었던 중국의 남종화풍을 받아들이고 익혔다. 이후에는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을 접목,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조선 남종화가 발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는 몰골과 담채를 사용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화조화를 그렸다. 이는 채색화조화가 유행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설중매화도(雪中探梅圖)’는 심사정이 매화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물이 흐르고 그 위로 파교가 놓여 있다. 파교의 오른쪽에는 한 남성이 나귀를 타고 다다랐다. 커다란 옷을 덮은 듯 입고 머리에는 가벼운 모자를 쓴 채다. 곁에는 그를 따르는 듯한 아이가 짐을 메고 함께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향하는 풍경은 삭막한 겨울의 모습이다. 소라껍데기 모양의 언덕에 나무는 헐벗었다. 둥글둥글 솟아난 산의 형태와 구불거리는 필선이 인상 깊다. 심사정 만년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이제 따듯해질 일, 그리고 매화를 볼 일만이 남았다.

김한들 큐레이터·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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