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시간 어겼다고 삭발, 딸에 대한 아빠의 사랑일까[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1. 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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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빠가 저한테 집착이 너무 심해요.”

“그 이유를 모르겠어?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지난 18일 방송된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의 한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과도한 통제와 구속이 고민이라는 딸에게 MC들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예뻐서 그렇다’는 말로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이 있을까요? 이날 방송은 제작진에 의한 한편의 ‘가스라이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8일 방영된 <무엇이든 물어보살>의 한 장면. KBS JOY 제공

<무엇이든 물어보살>은 MC인 이수근과 서장훈이 ‘보살’ 컨셉으로 분해 게스트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날 방송에는 90년대 댄스그룹 잉크의 멤버로 활동했던 이만복씨와 그의 자녀가 게스트로 출연했습니다. 이씨는 자녀들의 군입대나 생활방식에서 자신의 뜻을 강요하고, 자녀들은 그런 이씨의 양육방식에 불만을 터뜨립니다.

특히 중학생 딸은 아빠의 차별대우에 불만이 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롭게 돌아다닌 오빠와 달리 자신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입니다. 오후 7시30분까지는 무조건 귀가해야하고, 친구집에서 자는 것도 불가능한 생활. 이씨는 딸의 불만에 “오빠는 남자잖아”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답합니다. MC들 역시 부모의 성차별을 지적하기는 커녕 “내가 아버지여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후 공개된 이씨의 행동은 ‘훈육’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심각한 수준입니다. 딸이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강제로 삭발을 시킨 것인데요. 이씨는 “딸이 너무 예쁘다 보니 순간적으로 그랬다. 너무 미안해 바로 다음날 가발을 사줬다”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났다”며 문제의 책임을 딸에게로 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강조하면서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입니다.

지난 18일 방영된 <무엇이든 물어보살>의 한 장면. KBS JOY 제공

MC들 역시 ‘2차가해’에 동참합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생긴 일”이라며 이씨의 행동을 변호하죠. 삭발한 딸의 사진을 보고도 “두상이 예쁘다”며 칭찬을 하거나 “삭발을 한 아버지의 마음도 찢어졌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이해하라 말하기도 합니다. ‘삭발’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부모가 자녀의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켜버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프로그램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제작진은 딸의 고민에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강제로 머리를 밀렸을 때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아버지의 과도한 통제로 친구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진 않은지도 묻지 않죠. 대신 제작진은 딸이 하지도 않은 말(“이제 괜찮아요”)을 자막으로 달고, 딸의 웃는 얼굴을 비추며 갈등이 해결된 것처럼 포장해버립니다. 사실 갈등의 원인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면, 부모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수 있는걸까요.

전문가들은 이씨의 행동이 훈육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입을 모읍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가 지켜야 할 행동에 가이드라인을 두는 것은 훈육이지만, 이 가이드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때리거나 강제로 머리를 깎는 것은 엄연한 학대”라며 “한국 사회의 아동학대 인식이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습니다.

이어 “아동학대 가해자들은 백이면 백 ‘훈육’을 했을 뿐 ‘학대’는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설령 아버지가 훈육과 학대의 차이를 몰랐더라도 제작진만큼은 문제를 지적하고 부모교육을 권했어야 한다”며 “아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는건, 학대의 방관자이자 방조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18일 방영된 <무엇이든 물어보살>의 한 장면. KBS JOY 제공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정서적 폭력도 아동학대라는 인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12조도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능력을 갖춘 아동”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과의 관계맺음을 고민하는 이씨.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또래 예능인이 아닌 상담 전문가의 조언입니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씨 가족은 지금 위기 신호를 드러낸 것이다. 딸이 ‘자유롭게 시간을 쓸 권리’를 주장하는데도 아버지가 본인의 가치관만 옳다고 고집한다면 사랑하는 딸과의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있다”며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필요와 욕구가 달라진다. 지금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과 상담을 통해 아이들의 나이에 맞는 적절한 양육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만약 MC들이 제대로 된 ‘사이다 조언’을 쏟아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요. <무엇이든 넘어보살>에는 국가의 공적 개입이 필요한 수준의 사연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편의 가출로 수술 동의를 해줄 보호자가 사라져 암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싱글맘, 두살배기 아이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님을 알게 됐고 이후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버린 싱글대디… 이러한 ‘역대급 사연’들은 무책임한 배우자에 대한 공분을 자아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 부모가 방치하고 있는 아이들의 상황은 흐릿해지고,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무능 역시 지워지게 되죠.

최근 ‘정인이 사건’ 등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진 지금,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고민해결사’를 자처한 이들에겐 정말 고민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걸까요. 안일한 접근으로 아이들의 고통을 시청률에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아동학대는 사회의 낮은 인식을 먹고 자란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아동학대를 다루는 미디어의 책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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