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민주주의 영웅' 되자, 국민 머리는 땅바닥에 닿았다

한겨레 2021. 1. 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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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랜선 동남아][토요판] 랜선 동남아
⑧ 태국식 민주주의
1973년 군부정권 반대 학생시위
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백명 사상
푸미폰 국왕 라디오 연설 통해
"군부 사퇴·의회 재구성" 선언
왕 인기 오르고 통치자로 등극
76년 탐마삿대학 학살 사건 땐
경찰 소속 국경수비대도 가담
왕정 위협하는 공화주의자 탄압
1976년 10월 태국 군경과 극우파 청년들은 탐마삿대학을 포위한 뒤,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대를 때리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이미 숨진 학생을 나무에 매달고 극우파 청년이 철제 의자로 내리치는 사진은 1976년 탐마삿 학살을 상징한다. 지난해 열린 탐마삿 학살 44주년 기념 전시회장에 걸린 사진( 통신 닐 율레비치 촬영)을 관람객들이 바라보고 있다. 위키피디아

냉전시대 좌우 대립은 세계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동남아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동남아에 공을 들였다. 냉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7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을 만들었다. 시아이에이는 이전의 정보기구와 달리 민간인이 정보요원이 될 뿐만 아니라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전세계를 상대로 첩보활동은 물론 선전, 도발, 정치공작 등 특수활동을 벌였다. 미국은 이 기관을 통해 신생 독립국의 ‘반공·친미 지도자’를 육성하고 지원했다.

냉전 초기 미국 지도자들은 독재를 통해서라도 신생국에서 반공·친미 정권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공산주의가 자멸할 것이라 믿었다. 이 때문에 아시아의 독재자들에게 친미 동맹은 정권 유지를 위한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막대한 원조와 차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국(타이)의 사릿 타나랏 총리(재임 1959~1963)는 이러한 아시아 신생 독립국의 개발독재자 중에서 최고 모범생으로 꼽힌다.

태국 군부독재 뿌리는 반공

태국의 한 정치학자는 사릿 타나랏의 정치를 ‘대부(代父)식 독재’라 평가한다. 사릿은 부정부패와 잔악함, 여성 편력 등에서 영화에나 나올 법한 행태를 보인 인물이다. 그는 시아이에이가 공작을 통해 키운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1957년 쿠데타를 통해 육군 수장에서 태국 정계의 일인자로 올랐다.군부를 등에 업은 철권정치를 통해 자신의 정적과 진보 인사를 모두 제압하고는 미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뢰한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미국은 사릿이 푸미폰 왕을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만들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부식 군부독재 정치와 왕실의 신성불가침 원칙이 결합한 태국의 정치방정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던 태국의 사릿 타나랏 총리(재임 1959~1963). 냉전 시절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그를 가장 신뢰하고 지지했다. 위키피디아

사릿이 집권한 1950년대 말 인근 라오스와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미얀마(버마)에서는 사회주의가 우세했다.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약했던 태국에 미국의 원조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태국은 미국의 핵심기지 역할을 했다. 태국 공군기지에서 출발한 전투기들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폭탄을 마치 비처럼 쏟아부었다. 한국전쟁 때의 일본이 맡은 역할과 같았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태국에는 공장이 세워지고 발전소가 건설됐으며, 고속도로가 놓였다. 기지 주변으로는 미군을 위한 위락·유흥 산업이 번창했다.

베트남에 폭탄과 고엽제를 뿌렸던 미 공군기는 태국과 필리핀에서 이륙했으며, 육상의 이들 미군 기지 주변에는 우리나라의 미군 기지촌처럼 술집과 사창가가 길게 늘어섰다.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비엔티안) 근교의 펩시콜라 공장에서는 헬기로 공수해 온 아편을 마약상들이 가공해 값싼 헤로인을 만들었고, 이는 태국이나 필리핀의 홍등가에 휴가 나온 미군 병사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이처럼 인도차이나가 화염에 불타던 십여 년간 그 이웃들은 반공 독재 아래서 전쟁특수를 누렸다.

그러나 전쟁특수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그에 따라 늘어난 중산층이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게 된 것은 냉전기의 아이러니다.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개발을 해야만 공산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박정희만 한 게 아니었다. 못살고 못 먹고 못 배운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미혹된다는 사고는 냉전시대에 전세계에 넓게 퍼져 있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사회과학자들이 발전시킨 이 이론은 미국의 대외정책 입안자들에게 먼저 주입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냉전론자들이나 미국을 등에 업은 신생국의 반공·친미 독재자들도 중산층의 확대로 인한 사회 변화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 중산층의 대학생 자녀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학생이었듯이 동남아에서 반미 민주화를 외친 것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군복 입은 정치가들이 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봤다. 특히 베트남전쟁 시기 반미반전 운동은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프랑스 68혁명의 이상과 정신이 한국과 태국 등 동아시아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동남아의 군부독재도 한국 군사정권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태국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을 왕정 우호적으로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들이 1970년대에 일어났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태국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함성이 점차 높아가던 1973년 10월6일 방콕 시내에서 민주화와 개헌 요구가 담긴 전단을 돌리던 대학생 11명이 구속되자,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갈수록 커졌다. 일주일 뒤 50만명의 시민이 왕궁 옆에 있는 ‘왕이 행차하는 길’(라차담는 대로)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화들짝 놀란 정부는 시위로 구속된 학생과 시민을 조건 없이 석방한 뒤헌법 개정도 약속했다. 이에 시위를 주도한 ‘태국 전국학생연합’도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했다. 14일 아침 해산하던 시위대와 경찰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정부는 이를 핑계로 군을 동원하고 탱크와 헬리콥터를 투입했다.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이날 하루 77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부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푸미폰 왕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군부가 사퇴할 것이며, 새로운 총리를 임명해 의회를 재구성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는 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깨고 왕이 정치에 직접 개입해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법에 우선하는 신성한 왕권을 내세웠으며, 결국 이는 30년에 가까운 군부독재에 대항해 시민들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가로채는 일이었다.푸미폰 왕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나선 것이다.

1973년 10월 방콕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 모습. 군사정부는 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해 77명이 숨지고 800여명이 다쳤다. 위키피디아

경찰과 군, 극우단체의 연합작전

그 후 3년은 태국의 ‘민주주의 실험 기간’이었다. 26년 만에 맛보는 문민정부의 자유를 단 하루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학생과 시민운동가들은 더욱 진보적인 정치철학과 시스템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주변 환경이었다.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이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왕족들은 줄줄이 추방당하거나 감금당했다. 푸미폰 왕과 그의 지지자들은 인도차이나 3국 다음의 ‘공산화 도미노’는 태국일 것이라고 보고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진보세력은 곧 공산당이고 타이 민족의 주적(主敵)이라고 일찍부터 규정한 태국의 군부와 왕정파는 극우파 세력을 키우고, 왕실이 후원하는 단체를 늘렸으며, 다양한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왔다. 하지만 왕정파 군부와 태국 왕실이 공산주의자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은 국가원수로서의 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화주의자였다. 공화주의 민주정권이 들어서는 일만큼은 절대 막아야 했다. 그들은 민주화운동에 쐐기를 박을 결정적 한 방을 궁리했다.

1970년대의 태국 반공 포스터. “일어나라 태국인/사람/시민들이여”라고 쓰인 포스터는 공산당 군인(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상징)이 태국을 먹으려는 모습을 그렸다.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에서

1976년 10월 방콕의 탐마삿대학에서는 1973년에 퇴진한 군부독재자 타놈 끼띠카쫀의 귀국과 정치활동 재개를 반대하는 시위가 며칠째 벌어지고 있었다. 10월6일 새벽 2시 중무장한 국경순찰대와 경찰이 탐마삿대학을 에워쌌다. 민주화 시위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극우 청년들이 경찰 주변에서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등 연합작전을 벌였다.

경찰이 대학에 기관총을 쏘기 시작하자, 극우파 청년들은 정문을 부수고 들어가 시위대를 무작위로 때리고 죽이고 고문했다. 정부가 언론 보도를 봉쇄하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이 잔인무도한 학살 장면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학생과 시민들 머리 위로 무자비한 기관총 세례가 쏟아졌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투항해 바닥에 엎드린 학생과 시민들에게조차 가차 없는 군홧발이 날아들어 주변은 피투성이가 됐다.

베트남전쟁 취재차 잠시 태국에 들렀던 <에이피>(AP) 통신 기자 닐 율레비치는 이날 탐마삿 대학살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생명이 끊어진 학생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의자로 내려치는 광경을 웃으며 구경하는 극우파 청년들의 모습을 율레비치는 카메라에 담았다. ‘방콕 거리의 혼돈과 야만성에 관한 사진’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197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윗옷이 벗겨진 학생 수백명이 손을 머리 뒤로 올리고 운동장에 엎드려 있는 사진 속에서 군복을 입은 국경수비대가 들고 있는 미국산 M16 소총이 한없이 크게만 보인다. 많은 학생들이 총탄을 피해, 그리고 군인과 극우파 청년들을 피해 도서관 옆 짜오프라야강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전남도청의 그날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사상자 수가 파악되지 않은 이날의 사태는 폭동으로 왜곡됐던 광주민주화운동에 비견된다.

1976년 탐마삿 학살 때 군인들이 시위 학생들을 붙잡아 교내 잔디밭에 엎드리게 한 채 감시하고 있다. 현시내 제공

1973년 10월14일이 태국의 민주화 기념일로 인정받긴 했지만, 정작 1976년 10월6일을 뼈아픈 상실의 역사로 만든 데는 왕실의 작용이 있었다. 왕실 근위대 역할을 해온 국경수비대가 탐마삿대학 학살에 투입된 것은 최소한 왕실의 묵인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왕실모독죄가 최고 15년형까지 가능한 태국에서 왕실의 책임을 묻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이 국왕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숭앙받는 상황에서 왕실 비판은 법적 책임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립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탐마삿 대학살의 역사는 침묵을 강요당했고, 침묵은 학살의 주역들이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도록 조작하는 것을 방조했다.

그러나 강요된 침묵이 계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질식된 진실을 역사의 기억으로새기기 위해 1990년대 이후 광주 5·18기념재단과 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의 교류가 이뤄졌고, 2017년 5·18기념재단은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2016년 12월 왕실모독죄로 구금됐던 학생운동가 자투팟(짜뚜팟) 분파타라락사에게 ‘광주인권상’을 수여했다. 군주제 개혁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인권변호사 아논 남파도 ‘2021년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76년 10월의 방콕과 1980년 5월의 광주가 민주화운동으로 연대한 것이다.

어버이날은 왕과 왕비의 생일

1970년대 말부터 태국의 정치 담론을 장악해온 키워드는 ‘태국식 민주주의’다. ‘한국식 민주주의’를 외친박정희의 10월유신이 생각나는 말이다. 동남아식 민주주의는 각국 정치의 고유성과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적 담론에 따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의도 바뀐다. 냉전시기 개발독재의 환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기득권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탓이다.

태국의 극우파와 왕정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비의 생일을 ‘아버지의 날’과 ‘어머니의 날’로 만들었고, 왕족 앞에서는 일반 시민이 온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하도록 했다. 19세기 중반에 금지된 것을 되살린 것이다. 국왕과 왕실의 인기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태국 국민들의 머리는 바닥에 가까워졌다.

10대 청소년들이 세 손가락을 높이 들어 총리 퇴진, 헌법 개정, 그리고 왕정 개혁을 외친 2020년 9월까지, 태국 민주주의는 왕이라는 아버지의 발밑에 있었다. 2년 반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청년 민주화 투사 자투팟은 다시 거리에서 ‘아버지가 없는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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