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시대부터 2000년 넘게 운영한 철광산 한국에 존재

최수상 2021. 1. 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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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학연구센터 '달천광산'의 문화적 가치 재조명
연구보고서 '한반도를 먹여살린 2천년 통조림' 발간


▲진한~신라~조선거쳐 한일월드컵 열린 2002년 11월 폐광
▲최초 경영자는 신라왕 석탈해...김알지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에도 운영...1972년까지 일본에 철 수출

【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울산학연구센터가 울산 달천광산(達川鑛山)의 실체와 그 가치를 분석한 책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책 이름은 ‘한반도를 먹여살린 2천년 통조림’. 울산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김한태 전문위원이 집필했다.

저자에 따르면 울산의 달천광산은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11월에 폐광했다. 학계는 이곳 광산이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개발돼 2000년 넘게 운영돼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달천광산은 지표면에 드러난 토철(土鐵·철광석 가루가 황토에 섞여있는 것·노천광)뿐 아니라 지하 650m까지 뻗친 철광맥 덕택에 삼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문화, 산업 등 다양한 가치를 형성해왔다. 책 제목이 오래오래 보관이 가능한 '통조림'으로 비유된 이유이기도 하다. 채광계획도의 광산 단면을 보면 노면에서 수직으로 파 내려간 모양이 깡통을 닮은 것도 그 이유다.

책의 설명대로라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해외에서는 오래전 폐광된 소금광산을 문화자산으로 자랑하고, 고대 솔로몬왕의 구리광산이 발견됐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백년을 넘은 사업장이 드문 우리나라지만 울산에는 2천년 넘게 경영된 철광산이 존재한다"며 달천광산을 소개하고 있다.

울산학연구센터가 1월 발간한 교양서 '철기시대 살찌운 2쳔년의 통조림 '(김한태 저) 표지 그림은 달천광산의 단면도로, 노면에서 수직으로 땅속으로 뻗어있는 철광산의 모습이다. 통조림 깡통을 닯았다.

■ 광산 운영과 경영 기록 문서로 존재
자신감 있게 소개하는 이유는 광산을 연 시기가 사서에 나타나 있고, 운영주체와 상호가 있으며, 거래내역을 기록한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달천광산의 위치는 울산시 북구 달천동 산 20-1 일원으로, 면적은 28만4297㎡(8만6000평) 규모이다. 울산 북구가 해마다 개최하는 ‘쇠부리 축제’의 배경이다.

책에 따르면 이 광산의 운영 주체는 삼한시대 석탈해- 조선초엽 이종주 - 조선중엽 이의립 - 광복이후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로 이어진다. 고려 때 달천광산에 대한 공식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때 기록을 통해 광산이 계속 운영됐음 추정할 수 있다고 저자를 밝혔다.

기록된 거래내역을 보면, 중국 정사는 삼한시대 수출 상황을 기록했다. 서기 3세기에 쓰인 삼국지 동이전은 변·진한이 철을 생산해 이웃 나라에 수출하고 화폐로도 통용했다고 기록했다. 5세기에 쓰인 후한서 동이전에도 같은 사실을 기재했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 최대의 철을 생산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매년 정철 공납량이 1만2500근이었음이 기록돼 있다.

울산 쇠부리축제 달천철장 제철 재현 /사진=울산시 북구 제공

■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 제작에 사용

특히 조선 중엽 광산을 운영한 울산 출신 이의립은 임진・병자 양난에 쇠약해진 국방력을 강화시키고 민생의 기본도구인 솥과 쟁기를 제공했다. 최초의 시한폭탄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이곳 철을 녹여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중촌준송(中村俊松)과 석정광업(石井鑛業)에 수탈됐다. 광복 뒤 경주광업(주)이 잠시 경영했다. 뒤이어 5・16 혁명정부 때의 육군 공병대와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를 거쳐 삼미금속(주)으로 이어졌다. 현대의 광업 현황표는 한국전체 철광산 가운데 생산 순위 3위임을 밝히고 있다.

달천철광에서 나온 철광석은 1972년까지 전량 일본에 수출했다. 그때까지 포항제철이 준공되지 않았다. 포철은 1967년 6월 포항을 제철소 입지로 지정하고 그 이듬해 공사에 들어가 1973년 6월 첫 쇳물이 생산됐다. 맨처음 군사혁명정부는 당시 제철소 부지를 포항이 아닌 달천광산과 가까운 북구 양정동 현재 현대자동차 일원으로 낙점했었다.

책 중간에는 강한 독성 물질로 알려진 ‘비소’가 언급되고 있다. 비소는 이곳 달천광산의 DNA기능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비소가 포함된 철광은 달천광산뿐이기 때문이다. 경주, 김해 등에서 발굴된 비소함유 철제 유물들의 재료 원산지가 울산의 달천광산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이 때문이다.

달천광산 최후의 광산인이었던 윤석원씨가 작성한 달천광산 지하 225m까지의 채광계획도. 지하광체를 채굴하는 기본 계획도이다. 오른쪽 상부 지상에는 150마력 권양기와 광석 저장소가 있다. 오른쪽 그림은 중단채굴법(Sub Level Stoping)의 설명도이다. 노란색 채굴장은 -110m까지 채굴한 곳이고 -225m의 노란색 부분은 채굴했고 붉은 색은 아직 채굴하지 않은 철광석이다. <울산박물관 소장> /사진=울산학연구센터 제공

■ 대장장이는 권력자..두드리는 '도깨비'
책은 달천광산을 처음 개척한 인물로 예수와 동시대 인물인 석탈해임을 강조하고 대장장이인 석탈해가 한국 도깨비 설화의 원천이라는 의견도 제시 했다.

저자는 여러 연구논문 분석해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고대국가에서 권력자를 의미하며, 달천철장의 경영자이자 대장장이인 석탈해가 신라왕이 된 이유까지 설명했다. 석탈해는 이후 171년간 석씨 왕조를 이어가다 김알지에 달천철장과 왕조를 넘기게 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 강은해, 박은용 등의 논문을 인용해 ‘도깨비’라는 말과 설화의 근원은 ‘두두리(豆豆里)’로 ‘두드린다’라는 동사에서 변천됐고, 도깨비 방망이를 연상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불에 달군 쇠를 모루에 얹어 뚝딱뚝딱 두드려 농기구와 무기까지 다양한 도구를 만들낸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제철과 제련 능력을 갖춘 대장장이 석탈해를 투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다 두드리는 도구는 방망이, 망치, 절구 공이 등이 있는데 울산지역에서는 절구를 ‘도구통’라고 불렀고 절구 공이를 ‘돗구’라고 했다. 돗구에 남자를 뜻하는 ‘아비’가 결합된 이름에서 ‘돗구아비’ → ‘도깨비’로의 변화를 추정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충분한 가치

"2천년이란 시간은 신라 4대왕 석탈해가 달천철장을 열고 세력을 키운 시점을 기준으로 계산한 기간이다. 석탈해는 나이 62세인 서기 57년에 왕위에 올랐다. 태어난 해는 서력기원 5년 전쯤이다. 개략적으로 달천철장이 열린 이후 지금까지 기간은 예수가 태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기간에 해당된다." - 저자 -

"석탈해가 달천광산을 경영한 것은 자명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탈해의 제철기능을 인정한다. 그리고 기능을 발휘한 장소가 달천임을 여러 학자들이 입증하고 있다. 동서를 통해 2천년간 동일한 업종을 유지한 사업장은 희귀하다." 저자

"그렇게 드문 사업장으로는 채석장과 소금광산을 들 수 있지만 그 마저도 근현대까지 경영된 곳은 드물다. 최근 구약성서 시대 솔로몬왕이 경영하던 구리광산이 발견돼 토픽 뉴스가 됐다. 오래전 끊긴 채 전설이 되다시피 한 광산이었다. 오늘날 50년 이상된 건물이나 시설에 근대문화유산이란 가치를 부여하지만, 2천년된 것은 역사유산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달천광산은 그 존재도 토픽 뉴스가 되지 않았고, 폐업소식도 뉴스가 되지 않았다." - 저자 -
울산시기념물 제40호 달천철장(달천광산)이 2002년 11월 30일 폐광한 뒤 1년 후의 모습이다. 붉은 색의 흙색이 예전 이곳이 철광산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신라 철기문화의 토대로, 신라왕 석탈해가 경영을 시작한 뒤 2000년 넘게 운영되온 유서깊은 철광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달천광산을 처음 개척한 인물로 예수와 동시대 인물인 석탈해임을 강조하고 대장장이인 석탈해가 한국 도깨비 설화의 원천이라는 견해를 내세우며 문화유산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강조한다.

아울러 뒤늦게 달천광산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로 "문화사적 의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철장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대해서는 폐업에 임박해서야 조금씩 알려졌다"며 "진한(辰韓)의 제철보다 변한(弁韓)의 제철을 우위에 둔 사학계의 관행 탓이 컸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무려 2천년간 운영된 광산은 국가유산을 넘어 세계유산에 해당될 텐데, 제대로 된 기념 없이 매몰됐고 달천광산의 문명사적 가치를 알리는 분명한 근거가 있음에도 지극히 소홀했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며 “고대의 신소재 개척을 탐색한 이 책를 통해 달천광산의 가치와 울산의 창조 DNA를 음미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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