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선택'이란 말의 공허함..그는 마지막을 '선택'하지 않았다

한겨레 2021. 1. 2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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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토요판] 김도훈의 낯선 사람
① 스텔라 테넌트
80년대 슈퍼모델의 시대 저물고
90년대 '시대의 얼굴'로 떠올라
미니멀리즘 패션 구현 앞자리
성마른 패션계에서 30년 '장수'
건조한 세련됨 나를 매료시켰다
한달 전 50살 맞아 떠났단 소식
세상은 '극단적 선택'이라지만
그들에겐 선택의 의지란 없다
그리고 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스텔라 테넌트가 2018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샤넬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사전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파리/AP 연합뉴스

스텔라 테넌트가 죽었다. 이 문장부터 당신은 페이지를 넘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스텔라 테넌트가 누군지 아마도 당신은 모를 것이다. 모르는 자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쉽지 않다.

스텔라 테넌트는 모델이다. 이 문장에서 당신은 다시 페이지를 넘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배우가 아니다. 가수도 아니다. 모델이라는 직업은 이 글을 보는 당신의 레이더에 도무지 잡히지 않는 존재로서, 어쩌면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용한 셀레브리티일 것이다. 맞다. 스텔라 테넌트가 누군지 몰라도 당신은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앤절리나 졸리를 모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이야기다.

죽은 모델에 대한 이토록 긴 글을 읽지 않아도 당신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토록 낯선 사람인 스텔라 테넌트에 대한 이야기를 이 지면을 빌려서 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던데 새해에는 역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런웨이를 바꾼 90년대 패션의 아이콘

스텔라 테넌트는 영국 출신 패션모델이다. 1993년 모델로 데뷔하자마자 그의 얼굴은 시대의 얼굴이 됐다. 시대의 얼굴이라는 건 이전 시대와는 다르다는 의미다. 테넌트가 데뷔하기 전인 80년대는 슈퍼모델의 시대였다. 클라우디아 시퍼, 신디 크로퍼드, 나오미 캠벨 등 과도할 정도로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얼굴을 가진 모델들이 할리우드 배우만큼 인기를 얻었다.

원래 모델이라는 존재들은 럭셔리 브랜드의 옷 뒤로 숨은 존재였다. 슈퍼모델의 시대가 되면서 모델들은 패션의 전면으로 나섰다. 새로운 시대의 스타들이었다. 슈퍼모델 중 한명인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우리는 하루에 1만달러를 벌지 못한다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가히 거만한 말이었지만 그들은 거만해도 좋았다.

남자아이들은 그들의 포스터를 벽에 붙였다. 그런 여자와 함께 있고 싶었다. 여자아이들은 그들의 포스터를 벽에 붙였다.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브랜드 ‘게스’의 모델을 하던 클라우디아 시퍼의 포스터를 방에 커다랗게 붙여놨다. 그런 여자와 함께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시대의 얼굴이고 시대의 몸이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어떤 정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80년대는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였다. 전두환의 시대였다. 모든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강하고 화려해야만 했다.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는 봉긋 솟았고 색채는 난립했다. 재미있게도 10년을 기점으로 유행은 바뀐다. 60년대와 70년대의 패션은 다르다. 80년대와 90년대의 패션도 다르다.

90년대에는 ‘미니멀리즘’ 유행이 시작됐다. 과도한 화려함을 버리고 모든 것이 간결하고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패션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가 그랬다. 엄청난 기타 속주와 푸들 같은 헤어스타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던 헤비메탈은 점점 사라졌다. 3개의 코드만으로 기타를 쟁쟁거리는 펑크가 돌아오고 그런지 록이 탄생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육중한 근육을 가진 스타들은 점점 일거리를 잃었다. 대신 평범한 주변의 얼굴과 몸을 가진 브루스 윌리스 같은 남자들이 액션 스타가 됐다. 80년대에는 모두가 어깨 뽕을 넣은 아름다움에 매혹됐다. 그 시대는 끝났다. 패션에서는 금실로 지은 번쩍이는 베르사체와 장난스러운 장 폴 고티에의 시대가 가고 온통 검은색과 하얀색 천지인 질 샌더와 헬무트 랭의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은 80년대적인 화려함에 완벽하게 질린 나머지 정반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슈퍼모델의 시대가 끝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들은 과장된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좀 다른 존재를 런웨이와 패션 잡지에서 보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텔라 테넌트가 등장했다. 언제나 시대를 먼저 내다보던 샤넬의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는 그를 처음으로 기용해서 패션쇼 무대에 올렸다. 사람들은 놀랐다.

테넌트에게는 80년대의 슈퍼모델들이 지닌 휘황찬란함이 없었다. 몸매는 소년 같았다. 머리는 짧았다. 피부는 태닝한 흔적도 없이 창백했다. 긴 금발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글래머러스한 몸으로 무대를 휘젓던 이전 세대의 모델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다.

대학생이 된 나는 클라우디아 시퍼의 사진을 벽에서 떼버렸다. 스텔라 테넌트의 사진을 오려서 행정학원론 책 안에 넣어 책갈피로 썼다. 당시 사람들은 스텔라 테넌트 같은 모델을 두고 ‘헤로인 시크’라고 불렀다. 깡마른 몸으로 허무한 눈빛을 쏘는 모델들은 확실히 어딘가 마약중독자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스텔라 테넌트가 2015년 3월 파리 패션 위크 행사 중 디오르의 2015∼16년 가을/겨울 컬렉션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트렌드는 바뀐다. 바뀌기 때문에 트렌드라고 불리는 것이다. 90년대와 2000년대는 달랐다. 2000년대와 2010년대도 다르다. 육체의 매력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모델들의 생명력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않다. 성마른 패션계는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많은 모델이 짧은 전성기를 마치고 사라졌다.

놀랍게도 테넌트는 30여년을 살아남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년이 된 그를 디자이너들은 다시 런웨이로 불러들였다. 테넌트는 다시 샤넬의 무대에 섰다. 딸보다 어린 모델들 사이에서도 그는 여전히 90년대를 정의하던 건조한 세련됨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뭐든 젊고 새로운 것이 아름답다’를 모토로 내세우던 패션계의 오랜 에이지즘(ageism: 연령 차별)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반가웠다. 내 청춘의 한 자락을 정의하던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그가 런웨이에 선 모습을 볼 때마다 청춘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아 제법 기분이 짜릿했다.

스텔라 테넌트는 갑자기 죽었다. 2020년 12월22일 죽었다. 50세 생일을 맞이한 지 5일 만에 죽었다. 너무 이른 죽음에 쏟아지는 패션계의 애도가 끝나갈 즈음 유가족은 조금 늦게 성명을 발표했다. “테넌트가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더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건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는 의미였다. 외신들은 스텔라 테넌트의 사인이 자살로 밝혀졌다고 썼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다고 했다. 한국 언론은 스텔라 테넌트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썼다.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은 우울증 환자들이 버릇처럼 내뱉는 말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극단적 선택’이란 말의 공허함

재작년 겨울 미약하게 앓던 우울증이 극단적인 상태로 치달았다. 우울증이라는 괴물은 당신의 마음의 우물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손톱에 피를 철철 흘리며 기어이 기어 나온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의 독재자라도 된 듯 당신의 모든 것을 잠식한다. 의지로 해결 가능한 병이 아니다. 전문적인 의사가 처방하는 약으로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다.

나는 그걸 일찍 깨달았다. 스스로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러 의사를 통해 여러가지 약을 처방받았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먹었다. 그게 듣지 않자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를 먹었다. 거기에 도파민 촉진제를 얹었다. 거의 1년을 몰래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날 나는 회사에 앉아서 일을 하다 ‘고통 없이 자살하는 법’을 검색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만두어야 했다. 나는 마음의 암과 싸우는 유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앞으로 일보 진전하면 뒤로 이보 후퇴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인간이 그토록 간절하고 구체적으로 자살을 계획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누구도 자살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살하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하자 그런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했다. 자살이라는 말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자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고 자살을 꿈꿨다.

우리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대체했다. 중앙자살예방센터, 보건복지부와 한국기자협회는 자살 보도 권고기준을 만들었다. 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사망, 숨지다 등의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회피하고 자살 기사를 쓰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살 예방을 위해 자살 보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기만이다. 그래서 한국 언론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건 정말로 ‘선택’인가? 많은 자살은 우울증이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무시무시한 인지 변화를 겪는다. 긍정적인 생각 자체가 마음에서 완벽하게 사라진다. 모든 부정적인 기억을 꺼내어 곱씹고 또 곱씹는다. 세상은 곧 절망으로 가득 찬다. 희망은 완벽하게 소멸한다. 많은 우울증 환자가 죽는다. 그건 선택이 아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두뇌의 회로 자체가 어긋난다. 선택은 불가능하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을 언론사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 말도 자살이라는 단어와 결국 같은 의미를 갖게 됐다.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왜 자살이라는 말을 자살이라고 말하지 못하는가가 항상 의문이었다. 왜 모두가 그 단어를 불편해하고 회피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베르테르 효과를 막기 위해서? 하지만 사람들은 유명인이 죽었다고 그저 따라 죽지 않는다.

죽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고통과 각자의 이유가 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자살인 자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10대와 20대와 30대에게 자살은 사망 원인 1위다. 40대와 50대에서는 2위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스스로 죽어간다.

매일 긋고 매달고 삼키고 떨어진다. 더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모두가 짐짓 모른 체하는 시대의 역병과 우리를 더욱 정직하게 마주하도록 할 수도 있다. ‘자살’은 더욱 또박또박 소리 내어 떠들어야 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우울증의 우물로부터 기어 나왔다. 의지도 아니었다. 선택도 아니었다. 좋은 의사와 좋은 약을 찾은 덕이었다. 어쩌면 그건 그저 여러가지 우연이 겹친 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스텔라 테넌트는 죽었다. 자살했다.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스텔라 테넌트의 사진을 찾아보기를 원한다. 유튜브에서 그가 런웨이를 걷는 모습을 찾아보기를 원한다. 당신이 지금 새롭게 알게 된 인물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한 시대를 정의하고 그 시대를 넘어선 얼굴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스텔라 테넌트라는 모델이 있었다. 살아 있었다. 누구보다도 살아 있었다.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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