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운명의 벌레가 '갈로아'를 만들다

김도윤 작가 2021. 1. 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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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학자 길 걷는 곤충 웹툰작가 갈로아
 

‘이공계 만화가: 곤충, 화석, 별, 만화’. 

내 명함에 써넣은 글이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나만의 방식으로 패러디했다. 곤충, 공룡, 우주 과학소설(SF), 수학 등 매우 다양한 소재로 여러 매체에서 만화를 그렸더니,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담아낼 문구가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소개 글이다. 

큰 범주에서는 같은 과학으로 묶이더라도 곤충과 우주, 수학과 공룡은 소재 측면에서 다소 간극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의 작품 이력을 보고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모든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부 다 좋아해서다.

인생의 방향을 바꾼 운명의 벌레

내 운명을 바꾼 주인공, 갈로아벌레다. 김도윤 작가 제공

곤충을 좋아해 잠자리채를 들고 풀밭에 나가 곤충을 관찰하며 놀곤 했다. 대개 이런 취미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시들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중학생이 돼서도 즐겼다(사실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그만큼 곤충은 내게 매력적인 생물체다.

문제는 내가 곤충을 관찰하는 일 만큼 푹 빠져있던 분야가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만화 그리기였다. 그래서 2012년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곤충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재밌는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 사이에서 깊은 진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운명의 생명체를 만났다. 바로 갈로아벌레였다. 갈로아벌레는 빙하기 추위에 적응해 지금까지 살아있는 질긴 생존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결국, 나는 이 곤충의 강한 생존력과 독특한 매력의 빠져 과학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특이한 곤충을 채집했다는 핑계를 대며 여러 과학 연구소에 연락했다. 연구소에서 방문할 기회를 주면 나는 갈로아벌레 표본을 들고 찾아가곤 했다. 

다년간의 노력으로 내가 채집하고 모아온 곤충 표본이다. 김도윤 작가 제공

친구들은 그 시절 나의 행동을 두고 ‘매우 용감해 보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본인 연구실에 흥미를 갖고 연락하는 어린 학생들을 매몰차게 내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간혹 바빠서 답변을 못 하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나의 연락에도 과학자 대부분이 응답해줬다. 

덕분에 중, 고등학교 시절 여러 연구실을 방문해 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 책으로만 봤던 저명한 곤충학자들을 만났다. 가상의 존재라고 여겼던 곤충학자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체감했고, 당시 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경험은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다.

‘과학자와 만화가, 둘 다 하면 안 될까?’

좋아하는 일을 멈출 순 없었다. 과학자를 꿈꾸면서도 틈만 나면 만화를 그리곤 했다. 과학과 만화,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싶었다. 찾아보니 의외로 만화를 그리는 과학자가 있었다. 심지어 과학과 만화는 은근히 잘 어울렸다. 또 나만의 콘텐츠와 소재가 있다는 점은 만화가로서도 장점이었다. 

그림은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 따라 그리며 배웠다.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무라타 유스케 작가의 ‘원펀맨’ ‘아이실드21’을 주로 따라 그렸다. 손으로 그려본 것이 그림 실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여담이지만, 아이실드21은 미식축구 만화였는데 이 만화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대학에 진학한 뒤 미식축구팀에 입단했다가 금방 도망 나온 전적도 있다.

친구 따라 화석 캐다 떠오른 데뷔작

최근 TV 프로그램에 나가 이공계 만화가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나의 TV 데뷔는 9살 때다. 한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놀러 갔는데, 사회자가 내게 ‘장래희망이 뭔가요?’라고 물었고, 그림 좋게 ‘우주비행사’라고 대답했다. 훗날 나는 우주 SF를 주제로 데뷔했는데, 오래도록 이 인터뷰가 떠올랐다.

처음부터 우주 SF 소재로 데뷔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처럼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을 소재로 만화를 그리려고 했다. 고교 시절 내내 구상했는데, 생각만으로 재밌었다. 마침내 고3 수능이 끝나자 나는 한 달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5회분을 그려냈다. 그러나 막상 그렸더니 재미가 없어 바로 접었다. 

데뷔작의 아이디어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금은 운이 좋게 곤충 화석도 연구하고 있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 나는 곤충뿐만 아니라 화석에도 관심이 많아 생명과학과와 지질학과 진학 사이에서 고민했다. 진화를 연구할 때 화석은 역사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는 사실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오늘날 살아 움직이는 곤충에 더 마음이 기울었고, 마침내 서강대 생명과학과에 진학했다. 대신 지질학과 친구를 따라다니며 화석 캐는 일을 도우며 화석을 접했다. 

그러던 중 친구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지질학자가 많다는 얘기를 했다. 행성 표면과 돌덩이 연구에 지질학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아폴로 계획에서 달에 발을 디딘 과학자도 지질학자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우주의 다른 행성 표면에서 지질탐사를 하는 과학자의 이야기’. 주제가 정해지니 여러 가지 구상이 연달아 떠올랐고, 그길로 어렸을 적 좋아하던 우주와 동경하던 우주비행사들을 떠올리며 만화의 초안을 그렸다. 초등학생 때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NASA 케네디 우주센터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 초창기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온 사진들이 만화작업에 도움이 됐다. 그렇게 탄생한 만화가 ‘오디세이’였고, 나는 마침내 만화가로 데뷔했다.

다작 작가에서 다국적 활동 작가로

이후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등을 차례로 출판했다. 이 작품을 그린 이유는 역시 곤충의 진화에 관심이 많고 공룡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원래 알고 있는 내용으로만 만화를 그렸다. 그러나 막상 그리다 보니 욕심이 나서 자세히 묘사하게 됐고,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자세한 내용까지 누가 궁금해할까’ 싶기도 했는데 많은 분이 재밌게 봐줘서 기쁘고 고마웠다. 

2018년에는 과학동아 자매지인 수학동아에서 ‘숙녀들의 수첩’을 연재했다. 18~19세기 영국에서 발행했던 여성 수학잡지사를 소재로 다룬 만화였다. 잡지를 발행했던 실제 출판사 건물이 아직 영국 런던에 있다. 연재를 시작하기 직전 나는 오디세이로 국립과천과학관 주관 ‘SF어워드’에서 만화부문 대상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상금을 들고 취재를 빙자해 런던 여행을 떠났다. 이때 숙녀들의 수첩의 모티브가 된 출판사를 방문해서 만화를 위한 자료도 구해왔다. 

현재 내 만화들은 해외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오디세이는 일본어로 번역됐다. 일본에 사는 독자에게 지하철에서 오디세이를 보는 일본 사람을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감동이었다. 시답잖은 ‘아재개그’가 많이 녹아있었는데도 번역이 잘 돼서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다.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와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는 일본, 대만, 중국 등에 번역돼 출간됐다. 일본에서는 두 만화가 일본 아마존 학습만화 분야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수많은 곤충 마니아가 일본에서 건너온 곤충 책을 보고 자랐는데, 이제는 한국의 곤충 책이 일본으로 넘어가 인기를 얻으니 신기했다. 

보통 해외출간은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에이전시가 계약, 번역, 출판 등을 모두 도맡아 한다. 작가는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 그런데 영미권 출간은 좀 달랐다. 어느 정도 직접 번역을 해 오라는 것이다. 영어로 번역되면 다른 언어권의 국가로도 출간이 쉬워져서 그 점을 노렸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영어공부도 할 겸, 직접 번역하고 있다.

만화 그리는 곤충학자 되기 위한 한 걸음

내 방 책장의 모습이다. 어렸을적 부터 모은 곤충 표본과 공룡 피규어로 가득 차 있다. 김도윤 작가 제공

다양한 소재의 과학 만화를 그리다 보니, 종종 만화 외에 과학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2018년에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의 고생대 바닷속을 복원한 4m짜리 복원도 2장을 그렸다. 일주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무려 4주가 걸렸다. 해백합 하나를 그리더라도 바다와 강이 만나는 부분, 해수면의 잔잔함 정도 등을 토대로 해백합이 휘어져 있는 정도와 먹이를 섭취하는 구조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존하지 않는 과거의 생태계를 그려야 했으니 고생물학 박사님의 자문을 지속해서 받는 등 손이 굉장히 많이 간 작업이었다. 

2019년 고비랍토르 미누투스(Gobiraptor minutus)라는 신종 공룡 복원도를 그렸을 때도 화석으로 보존되지 않은 부분을 그리는 데 난관에 봉착했다. 기존 연구에 오늘날 실존하는 생물과 비교한 결과를 더해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넣어 그릴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힘들었지만 오히려 많이 배워서 좋은 경험이었다. 

극지연구소에서는 북극 탐사 프로젝트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극지연구소에서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곤충 화석을 연구하고 있다. 만화를 그리지만 늘 곤충학자가 되기 위해 고민하는데 그 바람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다. 

생물학은 그동안 초파리, 선충, 쥐와 같은 특정 모델생물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전 지구에는 90만 종의 곤충이 있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3000만여 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곤충들은 기존 모델생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깊이있는 논의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발전해서 지금은 여러 곤충을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됐다. 대신 배워야 할 내용이 많다. 현재는 새로운 기술로 곤충의 진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곤충 유전체 관련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다루기 위한 컴퓨터 언어도 배우고 있다. 

학자의 꿈을 위해 연구소에 몸담고 있지만, 만화는 계속 그릴 것이다. 그리고 연구와 만화를 병행하며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모두 효율적으로 잘할 방법을 찾고 있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1월호, [과동 키즈] 만화가와 곤충학자 사이

[김도윤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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