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브리엘의 에이즈 인권 20년..잘 싸우고 함께 살아냈다!

김종철 2021. 1.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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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토요판] 커버 스토리
윤가브리엘의 에이즈 인권 20년
2000년에 HIV/AIDS 확진 받은
성소수·감염·장애인 다중적 소수자
죽을 고비 넘기고 당당히 살아내
감염인에게 희망 '사람꽃'으로 우뚝
"소수자 중의 소수자 되고 보니
장애인·난민 등 차별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그들이 인정받는 세상 되길 바라"
2000년 초에 에이즈 확진을 받은 윤가브리엘(53)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대표는 지난 20년간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위해 살아왔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을 때는 항상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윤 대표가 지난해 11월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한겨레>와 만나 과거 20년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누구나 자신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차별과 혐오를 받는 소수자에게는 더 힘든 일이다. 윤가브리엘씨는 달랐다. 그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환자이자 성소수자임을 밝히고 세상의 낙인찍기에 당당히 맞섰다. 그는 2000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이즈 감염인으로 보건소에서 통보받은 이후부터 줄곧 감염인이 공포와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와 보호,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임을 온몸으로 증언해 왔다. 다국적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의약품접근권 투쟁 때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때 시력과 청력을 거의 다 잃어 장애인이라는 또 다른 소수자성을 더했지만, 의료와 의약품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만큼 그가 살아낸 20년은 한국 에이즈 인권운동의 역사이자,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대신 공존과 연대의 폭을 넓혀온 시간이었다. 지난해 11월19일 서울 대학로에 있는 ‘KNP+’(한국 HIV/AIDS감염인연합회) 사무실에서 1차 인터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상계동 그의 집에서 2차 인터뷰를 했다. 지난해 11월27일 ‘윤가브리엘 생존 20돌’ 축하 모임도 기사에 담았다.

화환에 매다는 기다란 리본과 축하 케이크가 행사 전부터 한쪽 탁상 위에 놓여 있었다. 1부 토크쇼와 2부 영상 시청, 3부 마무리 대화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주인공 주변에 모여들었다. 케이크를 날랐고, 리본도 뒤따라왔다. 두 가닥 리본에는 각각 “윤가브리엘 PL 20년” “잘 싸우고 함께 살아냈다”라는 글귀가 펄럭였다. 케이크에도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PL(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지니고 사는 사람으로, 이 질병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라 질병이 있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다. 알록달록한 무늬의 긴 리본은 주인공의 목 아래 가슴께에 붙여졌다. 감염인 윤가브리엘은 어떤 화환보다 아름다운 꽃이 됐다.

지난해 11월27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인권재단 사람’ 회의실에는 ‘사람꽃’ 윤가브리엘을 사랑하는 ‘사람’ 20명이 모였다. 코로나 재확산 상황을 고려해 20명만 초청했다. 윤가브리엘이 PL로 살아낸 20년을 상징하는 숫자다. 윤가브리엘의 생존 20년과 함께, 푸제온(에이즈 치료제) 투약 중단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는 바이러스가더 이상 검출되지 않아서 지난해 10월 의사의 권유로 13년 동안 투약해온 푸제온을 끊었다.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다른 치료약들은 계속 먹어야 하지만, 하루 두 번씩 몸에 주사를 꽂아야 하는 고통에서는 해방됐다.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지난해 11월27일 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지난 20년 동안 감염인으로 살아낸 시간을 축하받으며 동료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살아냈다, 살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료들은 “윤가브리엘 PL 20년” “잘 싸우고 함께 살아냈다”라고 쓴 리본을 윤 대표 몸에 걸어줬다. 왼쪽 옆은 이날 사회를 맡은 남웅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운영위원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지난해 11월27일 생존 20주년 기념행사에서 동료 인권운동가들한테 받은 케이크.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에이즈, 대체 그까짓 게 뭔데!”

“뭐가 자랑스러워요?(웃음) 다만 연대하는 활동가, 친구들과 함께 해온 활동들이 자랑이라면 자랑이죠. 그동안 나누리플러스 외에도 에이즈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생겨났고, 감염인 단체와 비감염인 단체들이 함께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동안 에이즈 역사에서 성소수자 쪽과 감염인 쪽이 서로 등을 돌렸었는데 나누리플러스 활동을 통해 신뢰가 쌓이면서 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게 된 게 의미가 있죠. 앞으로 좀 더 발전해 나갔으면 합니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지난 20년을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운 게 뭐였냐”고 묻자, 윤가브리엘은 활동가들 간의 연대를 꼽았다.

가브리엘은 세례명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는 의미가 좋아, 2002년 세례 받을 때 고른 이름이다. 차별받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인들의 아픔을 세상에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픈 마음에서였다. 새천년이 막 시작된 2000년 3월 가브리엘은 HIV 감염 및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1999년 겨울 기침과 설사, 열이 오래 지속돼 독감인 줄 알고 동네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았다. 결핵이 의심스럽다는 의사 말에 보건소에 갔다가 확인됐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과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개념이 다르다. HIV가 몸속에 들어오는 상태, 즉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몸의 면역체계가 서서히 파괴된다. 길면 10년 정도 걸리기도 한다. 면역 수준이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에 의해 다른 병이 생기거나 뇌신경 계통에 문제가 나타나는데 이런 증상을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라고 부른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HIV 감염인이지만, HIV에 감염됐다고 모두가 에이즈는 아니다. 윤가브리엘은 이미 질환 증세가 나타난 상태였다.

“보건소에 갔더니 담당자가 에이즈 통보를 하는데 그렇게 큰 충격은 난생처음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빨리 병원에 가라면서 써준 의뢰서를 들고 보건소 문을 나오는데 완전히 딴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때 너무 몸이 안 좋아서 이러다가 곧 죽겠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윤가브리엘씨가 지난해 11월27일 밤 그가 살아낸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모임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미검출자는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U=U’ 알림판을 들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충격의 늪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친구의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손길이었다. 동대문 근처 작은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할 때였는데 아파서 오랫동안 출근하지 못하자, ‘여자사람 친구’ 선영이 안부를 물었다. 몇달 새 10㎏ 이상 체중이 빠진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는 선영에게 가브리엘은 고민하다가 “에이즈에 걸렸대”라고 말했다. 선영이는 “어떡해, 너 어떡해”라며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치료비가 많이 들 거라면서 돈까지 빌려줬다.

“에이즈 통보를 받은 뒤에 제일 큰 걱정이 인간관계였어요. 이전까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키고 배제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이 가장 컸어요. 그랬는데 친구들이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안아줬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줬고요. 입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년 만에 연락한 형들도 저를 외면하지 않고 감싸줬어요. 그때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달리 반응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숨어버렸을 거예요. 그러면 치료를 못 받았을 것이고 병은 악화됐겠죠. 누구나 아프면 위로받아야 하는데 감염인들은 가족들한테까지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게 소외받으면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릴래’ 하면서 치료를 안 받게 되죠.”

한달 동안의 입원 치료가 끝난 뒤 보건소의 소개로 외국인 수녀가 운영하는 감염인 쉼터를 찾았다. 쉼터에서 그는 같은 처지의 에이즈 환자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 눈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 가족들한테도 버림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분노했다. 감염인 가브리엘이 자기 몸을 돌보는 데만 머물지 않고 인권운동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진 후 차별과 냉대 속에서 한숨지으며 살아가는 쉼터의 감염인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지 않으려면 감염 사실을 꼭꼭 숨기고 살아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그러나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에이즈, 대체 그까짓 게 뭔데! 알고 보면 여타의 질병들과 다를 게 없는데 왜 우리를 옭아매고 쫓아내려는지 화가 나기도 했다. 이 넓은 세상에 감염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관심 있는 곳이 쉼터밖에 없다는 현실도 한심스러웠다.”(<하늘을 듣는다>, 2010년)

성소수자 단체에서 ‘에이즈 인권’ 눈떠

1980년 미국에서 처음 환자가 보고되고 이듬해 질병으로 공식 기록된 에이즈는 처음에는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는데다가 치사율이 높아 불치병으로 불렸다. 초기 환자의 대부분이 남성 동성애자여서 동성애의 결과물인 것처럼 여겨졌다. 또 에이즈 환자와의 단순 접촉만으로도 병이 전염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이 때문에 에이즈 환자는 기피와 감시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연구 결과 HIV 바이러스가 원인이며, 이 바이러스는 혈액이나 정액, 질 분비물 등 체액을 통해서만 전염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감염인과 음식을 같이 먹거나 가벼운 키스 등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옮지 않으며, 수혈 때 감염된 혈액을 철저하게 걸러내고 성생활 때 콘돔을 사용하면 100% 가까이 예방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 치료제가 많이 개발돼 이제는 약만 꾸준히 먹으면 감염인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기대수명을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초창기의 잘못된 정보로 형성된 감염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지금도 많다. 가브리엘이 감염인이 됐을 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지난해 11월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귀가하기 위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에 의지한 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 윤 대표는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가 약값을 올려받기 위해 새로운 치료제인 ‘푸제온’ 공급을 거부하는 바람에 2006년에 시력의 대부분과 청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는 분노는 많은데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감염인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등은 말 그대로 예방에만 신경썼는데 그것도 인권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에이즈에 걸리면 죽는다’는 식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의 활동을 벌였고요. ‘이런 건 아닌데’ 고민하다가 ‘동성애자인권연대’(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약칭 행성인)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서 찾아갔어요. 성소수자 중에는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많으니까 이들은 감염인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탐색하러 갔죠. 감염된 첫해인 2000년이었어요.”

1968년 혼외자로 태어난 가브리엘은 집안에서 어머니와 형들에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핍박을 많이 받았다. 견디다 못한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된 1982년 봄 옷가지 몇개만 챙겨, 공장에서 일하던 같은 반 친구를 따라 가출했다. 14살 때였다. 동대문 근처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시다 보조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 동안 일했다. 가브리엘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다가 20대에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자신을 세상의 편견대로 변태라고 자책하는 등 번민과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수용하고 긍정하게 된 것은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였다.

“매 주말 밤이면 오늘은 어디 가서 놀까를 궁리하던 나에게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동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회의나 세미나의 주제인 차별, 억압, 평등, 커밍아웃, 연대 등의 이야기들은 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하늘을 듣는다>)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은 떨쳤지만, 감염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들에게도 한참 동안 말하지 못한 채 묻어뒀다.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도 감염인을 외면하거나 꺼리는 풍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에이즈의 날(12월1일)을 앞둔 어느날 그는 세미나 주제로 에이즈 문제를 넌지시 제안했다.

“발제를 맡은 정욜은 에이즈는 무엇보다 인권의 문제라고 하였다. 감염인들이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동성애자를 에이즈의 온상으로 뒤집어씌우는 부당함에 항의해야 한다고 했다. 감염인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가 여기 있었구나! …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발한 인권 활동에 참여하면서 보람도 느꼈고 동지애라는 것도 처음 느꼈다.”(<하늘을 듣는다>)

윤가브리엘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의 에이즈 살아남기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2020년 11월27일)에서 윤 대표(왼쪽)와 남웅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운영위원장이 이야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푸제온 약 때문에 죽고 살고

자신감을 얻은 가브리엘은 그곳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HIV 감염인이란 사실을 고백했다. 후배는 “많이 힘들었겠네. 몸은 괜찮은 거야?”라며 위로하고 다독여줬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2003년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이 주최하는 아시아보건포럼에서 한국인 에이즈 문제에 대한 발제를 해달라는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100여명의 전문가와 청중 앞에서 그는 감염인 당사자로서 “에이즈 때문이 아니라 혐오 때문에 아프다”고 외쳤다.

“여러 사람 앞에서 처음 얼굴을 드러내고 얘기해야 하니까 겁도 나고 고민도 많이 됐죠. 그러나 당시 감염인 머리에 칩을 심어서 동선을 감시해야 한다는 신문 칼럼이 나오는가 하면 에이즈 환자에 대한 병원 진료가 거부되는 등 사회적 차별과 혐오가 너무 심했어요. 그런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 너무 화가 나 있던 참이었는데 발제 제안이 왔길래 가서 소리라도 치고, 하소연이라도 하자는 마음에서 나갔어요. 막상 단상에서는 너무 떨려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에이즈 때문이 아니라 혐오 때문에 아프다”는 발언은 울림이 컸다. 그의 외침에 공감한 단체와 개인들이 모였고, 2004년 초 마침내 에이즈 인권운동을 위한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나누리플러스’)가 결성됐다.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친구사이 등 성소수자 단체,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 보건의료단체, 인권운동사랑방 등 인권단체가 두루 참여했다. 대표로는 윤가브리엘을 뽑았다.

나누리플러스는 감염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일부터 시작했다. 결성 첫해에 유엔의 HIV/AIDS와 인권에 관한 국제가이드라인(1997)을 바탕으로 ‘HIV/AIDS 인권지침서’를 만들었다. 이어 2006년에는 감염인에 대한 관리와 감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개정 운동을 벌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익명 검진 제도가 생겼으며, 감염인이 이사할 때마다 그리고 사망했을 때 신고해야 하는 제도도 폐지됐다. 또 직장 건강검진 결과도 본인에게만 통보하도록 바뀌었으며, ‘사용자는 근로자가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근로관계에 있어서 불이익을 주거나 차별대우를 하여서는 안 된다’는 차별 금지 조항이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명시됐다.

“우리나라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 나온 게 1985년인데 많은 감염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래도 많이 개선돼왔다고 봐요. 이렇게 감염인 단체가 존재하는 것도 달라진 것이죠. 전에는 다들 각자 어딘가에서 숨어 있어서 함께 모이기도 어려웠거든요. 사회적으로도 과거에는 격리와 강제치료 이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은 없어졌어요. 감염인을 고용상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법에 들어간 것도 상징적이고요. 그러나 아직 멀었어요. 감염인을 HIV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람으로 보는 ‘전파매개 금지 조항’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거든요.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19조)는 조항은 감염인에게 성적 문란자라는 낙인을 찍을 뿐 아니라 심지어 범죄자로 만드는 조항입니다. 감염인의 인권 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이 조항을 없애야 해요.”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6월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날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마이크 잡은 이가 윤가브리엘씨.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04년 ‘인권연대 나누리+’ 결성
에이즈법의 반인권 조항 개정
로슈 상대 의약품접근권 투쟁 등
감염인 인권운동에 앞장서와

“힘들어 다 포기할까 갈등했으나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 위해 싸워
그 과정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HIV 바이러스가 전파가 불가능한 지수로 떨어질 정도로 의약품은 발달했다. 하지만 다국적 제약회사는 특허권을 내세워 치료약에 대한 접근을 막곤 한다. 다국적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의약품접근권 투쟁에도 나누리플러스와 가브리엘이 앞장섰다. 가브리엘은 2004년부터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치료약에 내성이 생겨서 면역력이 제로에 가까웠다. 전해인 2003년 다국적 제약회사인 로슈가 미국과 유럽에서 출시한 푸제온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국내에서는 2004년 11월에 보건복지부가 연간 약 1800만원으로 보험 등재하였으나 로슈는 약 3200만원을 요구하며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았다. 로슈가 횡포를 부리는 사이 가브리엘의 몸은 거대세포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망가져갔다. 거대세포 바이러스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에이즈 환자 등 면역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장과 신경계, 망막 등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다.

2006년 11월 가브리엘은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신경계로 침투하는 바람에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의사는 그에게 “가망이 없을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가브리엘은 결국 오른쪽 눈 망막이 떨어져 나가 실명하고, 왼쪽 눈도 망막이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실리콘으로 고정하는 긴급 수술로 왼쪽 눈은 겨우 실명을 면했다. 어릴 때부터 앓았던 중이염도 악화됐다. 이 때문에 그는 돋보기 안경을 써야 겨우 글자를 읽을 수 있고, 보청기를 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애인이 됐다.

코로나 사태가 두려운 까닭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급한 상태의 가브리엘을 구한 것은 인권운동 동지이자 친구들이었다. 나누리플러스 활동가들은 그를 위해 후원의 밤을 여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의 에이즈 구호단체인 ‘에이드 포 에이즈’(Aid for AIDS)로부터 푸제온을 지원받았다. 2007년 10월부터 푸제온 주사약을 쓰기 시작한 지 몇달 안 돼 가브리엘은 면역수치가 높아졌다.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자,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로슈에 대한 싸움이었다. 자신처럼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환자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로서 의약품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와 나누리플러스 친구들은 2008년 10월1일 로슈 창립일에 맞춰 서울과 파리, 방콕, 뉴욕 등 세계 각지에서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을 순차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또 한국 정부를 상대로는 푸제온에 대한 강제실시를 요구했다. 특허약품에 대한 강제실시는 특허권 남용으로 사람이 죽어갈 때 그 폐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국가가 결단하는 권리다. 타이나 브라질 정부는 에이즈 치료제 등 필수약품에 대해 여러 차례 강제실시를 발동한 바 있다. 강제실시 압박이 강해지자, 로슈는 2009년부터는 아예 한국에 푸제온 무상 공급에 나섰다.

“로슈가 2004년부터 푸제온을 공급했더라면 저는 죽을 고비를 안 겪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쪽 눈 실명도 안 됐을 거고요. 어쨌든 그런 싸움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푸제온뿐 아니라 성능이 좋은 약들이 많이 들어와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약 공급은 원활하긴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약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해서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죠. 최대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제약사들의 탐욕스러운 본질은 그대로이고, 에프티에이(FTA·자유무역협정)로 이들의 특허 기간이 더 느는 바람에 건강보험 재정이 부담해야 하는 약제비가 늘었거든요. 전세계적으로 보면 아직도 비싼 약값 때문에 약을 못 먹어 죽는 에이즈 환자가 많아요. 여전히 에이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약에 접근할 수 없어서 죽고 있어요.”

그는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갔다. 2013년에 있었던 ㅅ요양병원 사건과 2017년 말의 디셈버퍼스트(12·1) 투쟁이 대표적이다. 요양병원 사건은 장기 치료가 필요한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하기로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와 위탁계약한 수도권의 한 요양병원에서 감염인이 숨진 일이다. 이 병원은 수액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상급종합병원 의사의 소견서에도 불구하고 수액 주사를 거부했으며, 결국 이 환자에게 호흡곤란이 왔는데도 제때 상급병원으로 이송하지 않아 숨졌다. 차별적 치료 논란이 일자, 질병관리본부는 그해 말 ㅅ요양병원과의 위탁계약을 해지한 것 외엔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에이즈 환자가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 없다. 가브리엘과 친구들이 국립요양병원 등 대책을 요구했지만, 아직 요양병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7년 7월 국립재활원에서 감염인의 입원을 거부한 사례를 비롯해 의료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의료시스템 안에서 HIV 감염인은 아직도 치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요. 감염내과가 있는 종합병원에서만 마음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거든요. 감기나 피부 트러블이 있어서 동네병원에 갈 때는 치료 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HIV 약을 먹고 있다고 밝히면 에이즈 전문 장비가 없다는 핑계를 들어 치료를 대부분 거부해요. 의료진이 의료행위를 할 때는 HIV도 B형이나 C형 간염과 예방법이 같잖아요. 그런데도 유독 HIV에 대해서만 차별을 하죠. 갈 길이 멀어요.”

세계 에이즈의 날인 12월1일에 맞춘 디셈버퍼스트는 반동성애 운동이었다. 가브리엘과 친구들이 2006년부터 이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이름을 바꿔 여러 행사를 벌이는 데 대해 기독교 쪽 등 반동성애 진영이 맞불을 지르는 성격이 강하다. 행사장에서 거세게 항의한 끝에 1분 발언권을 얻은 가브리엘은 “두려움과 혐오를 조장하는 방식으로는 에이즈를 예방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지난해 이태원발 코로나 확산 사건을 온 국민이 봤잖아요.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했던 낙인과 차별이 오히려 부메랑이 됐지요. 그들이 왜 숨어서 그렇게 많이 모였겠어요? 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다면 그런 클럽에 그렇게 따로 모일 일이 애초부터 없을 거예요. 그러한 편견과 낙인찍기부터 없애는 게 급선무죠.”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가브리엘의 우려는 적지 않다. 코로나 병상 확보를 위해 HIV 감염인에 대한 치료가 뒤로 밀리는 직접적인 피해도 문제이지만, 감염성 질병에 대한 국민들의 차별적 시선이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최근에 국민 인식 조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게 감염성 질병이더군요.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는 10위로 나왔는데 말이죠.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감염병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더 나빠진 거죠. 에이즈예방법이 예방을 위해서는 감염인의 인권을 제한해도 된다는 논리로 만들어졌듯이 결국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서는 사생활을 더 제한해도 된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친절하고 예쁜 사람으로 늙고 싶어요”

성소수자에 HIV 감염인, 게다가 장애인인 가브리엘은 다중적 소수자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몸을 짓이겨온 3가지 소수자성에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왔다. 2016년에 만난 암도 극복했다.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지난 18일에는 중이염 수술도 했다. 결국 더 좋은 청력을 얻었다. “저도 사람이니까 장애 등록까지 했을 때는 막다른 골목까지 온 것 같아서 우울했죠. 힘든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계속되니까 모든 걸 놔버리고 싶다는 갈등도 있었어요. 그러나 돌아보면 그런 힘든 과정에서 상처가 많았지만 그 상처들이 나를 강하게 만든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힘든 일을 예전에도 겪었는데 어떤 일을 만나든 이만한 일을 못할까 싶은 거죠. 또 소수자 중의 소수자가 되어 보니까 차별받는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장애인이라든지 난민, 이주민 등 그동안 안 들렸던 사람들의 문제와 그들의 목소리가 보이고 들리는 거예요. 앞으로 이들과 더 연대하고 싶어요. 모든 소수자가 자기 목소리를 찾고, 그래서 소수자성이 다양성의 하나로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지난 20년 동안 친구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도 이제 그들과 함께 소수자성이 인정되는 세상을 향해 가려고요.”

당당하고 굳센 인권투사 가브리엘이 소망하는 개인적 꿈이 궁금했다.

윤가브리엘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는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그의 작은 방 책장에 그동안 사 모은 음반 시디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저도 벌써 53살이에요.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 불친절하고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들을 보면서 저는 좀 친절하고 얼굴도 마음도 예쁜 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남의 이야기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해요.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윤가브리엘의 20년을 축하하는 행사장(11월27일)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위로받았던 가수 한영애의 노래 ‘여울목’이 흘렀다. “덧없는 세월 속에서 거친 파도 만나면/ 눈물겹도록 지난날의 꿈이 그리워/ 은빛 찬란한 물결 헤치고/ 나는 외로이 꿈을 찾는다”라는 노랫말이 흐르는 가운데 20명의 친구들이 가브리엘 주위에 모여 즉석 구호를 외쳤다. “살아냈다, 살아냈다, 살아냈다, 투쟁!” “살아내자, 살아내자, 살아내자, 투쟁!” 살아낸 것도 살아내는 것도 투쟁의 연속인 가브리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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