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도 반했다는.. '괴물' 속 배두나 추리닝 기억나십니까?
“저를 좋아하게 된 게 영화 ‘괴물’ 때문이었대요. 제가 수원시청 트레이닝복 딱 한 벌만 입고 시종일관 뛰어다니거든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배우 배두나는 최근 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루이비통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얽힌 인연을 얘기하며 영화 ‘괴물’ 속 트레이닝복을 언급했다. 천재 양궁 선수 역할이었던 배두나는 큼지막하게 ‘수원시청’이라 적힌 자주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괴물에게 활을 겨눈다. 모델 출신 패셔니스타에 꼬질꼬질한 트레이닝복 한 벌만을 입혀 당시에도 화제가 됐다. 영화가 흥행하자 수원시청에는 “트레이닝복을 구할 수 없느냐”는 문의가 쇄도하기도 했다.
루이비통 디자이너도 반한 ‘괴물’ 속 트레이닝복을 20일 경기도 파주 한국영상자료원 보존센터에서 볼 수 있었다. 격렬한 사투 끝에 ‘수원시청’ 글씨는 누렇고 검은 때가 묻은 채 너덜너덜하게 해져 있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4년부터 ‘한국 영화 유산 수집 캠페인’을 통해 영화 의상 및 소품을 수집해 왔다. 2000년 작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2020년 작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까지 기증받은 영화 의상·소품 500여 점을 정리해 기관지 ‘옷의 뜻–영화의 의상, 의상의 영화’를 최근 발간했다.
파주 보존센터에는 80평 남짓한 보존고 2곳에 영화 의상·소품과 기자재들이 보관돼 있다. 보관이 쉬운 양장은 옷걸이에 걸어놓고, 산화하기 쉬운 한복이나 손상이 심한 옷은 특수 제작 상자에 넣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특허 낸 항균제를 뿌리고 도자기 등 문화재를 감쌀 때 쓰는 얇은 종이로 덮어 고이 보관한다. 장광헌 보존관리팀 차장은 “의상 대부분은 오염이 심한 상태로 들어온다”면서 “영화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세탁은 하지 않고 흙먼지나 심한 오염만 제거한다”고 했다.
특히 액션·재난 영화는 옷의 손상 정도가 극심하다. 유독 가스로 뒤덮인 도심을 탈출하는 영화 ‘엑시트’ 의상에는 온몸으로 건물을 기어오르고 바닥을 뒹군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연회장 ‘구름정원’의 부점장인 의주(임윤아)의 하얀 셔츠는 회색 조끼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시커메졌다. 채경화 의상 감독은 “재난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닥치기 때문에 불편한 정장을 입고 현장을 구르는 ‘미스매치(부조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엔 보라색 유니폼도 떠올렸는데, 윤아씨가 가수 출신이고 화려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오히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무난한 의상이 낫겠다고 판단했죠.”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선우(이병헌)가 입었던 셔츠는 피범벅이 된 채 남아 있다. 양복은 화약을 넣고 터뜨린 총상 흔적으로 군데군데 찢겨 있다. 장광헌 차장은 “피는 보통 캐러멜을 섞은 염료를 쓰는데, 그대로 두면 옷이 뻣뻣해져 부러질 수 있다”면서 “이런 옷은 주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해줘야 한다”고 했다.
의상 크기와 관리 방법도 제각각이다. 영화 ‘인랑’에서 강동원이 입은 강화복은 머리에 쓰는 투구부터 온몸을 감싸는 갑옷 형태로 22㎏이나 된다. 강화복은 팔·다리 부분을 조각조각 내 상자 6개에 나눠 보관했다.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전도연·배용준이 입은 한복은 보존고에서 매우 비싼 의상 중 하나다. “한복은 접힌 부분이 산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 기관에 관리 방법을 묻기도 했어요.”
의상에는 영화 속 시대와 공간, 캐릭터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고졸 말단 직원만 유니폼을 입어야 했던 1990년대가 배경이다. U자 모양으로 둥글게 파인 자주색 유니폼은 회사에서 커피를 타고 잡일을 도맡는 여직원의 지위를 드러낸다. 윤정희 의상감독은 “1990년대 드라마에 나온 의상을 참조했고 색깔은 차가운 남색이나 밋밋한 베이지보다는 따뜻한 느낌의 자주색이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다. “무늬 있는 블라우스도 제작해서 입혀봤는데요. 대기업 직원보다는 옛날 은행 직원 느낌이 많이 나서 바꿨죠. 실제 1990년대처럼 헐렁하게 만들면 요즘 배우들은 한 치수 큰 옷 입은 듯 어색해하기 때문에 사이즈는 좀 더 몸에 맞게 수정했고요.”
의상은 대부분 비공개지만 기획전을 위해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전시하기도 한다. 현재 서울 마포구 한국영화박물관에는 영화 ‘기생충’ 의상이 전시돼 있다. 명대사인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를 할 때 입었던 기택(송강호)의 트레이닝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 아들 기우(최우식)의 잿빛 트레이닝복은 반지하 공간을 닮아 밋밋하고 우중충하다.
최세연 의상 감독은 “배우들이 공간에 완전히 흡수돼 소품처럼 보이도록 신경 썼다”고 했다. “기택이나 기우의 트레이닝복은 자연스러운 생활감을 주기 위해 염색도 세탁도 여러 번 거쳤죠. 반면 연교(조여정) 드레스는 ‘딱 봐도 저 옷은 세탁기는 못 돌리겠다’ 싶잖아요. 기택네는 정말 열심히 빨아서 오래된 생활감이 보이는 옷, 박 사장네는 무조건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할 것 같은 옷으로 나뉘죠.”
무늬 없이 밋밋한 의상들 가운데 문광(이정은)의 실크 머플러가 도드라진다. 폭우가 내리던 밤, 초인종을 누르며 등장해 영화의 흐름을 뒤바꿨던 그 장면 속 그 차림이다. 온몸을 가리는 시커먼 코트에 무늬 화려한 머플러를 둘렀다. “가정부로 살았던 문광과 한번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문광의 대비가 필요했어요. 머플러로 컬러나 패턴에 변화를 줬죠. 검은 코트는 비를 흠뻑 맞고 들어오는데 그 빗방울이 옷에 맺힐 수 있는 원단으로 제작했고요.”
전시되지 않은 의상들은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잡지나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 잡지에는 2000년대 영화 50여 편과 영화 의상 수백 점이 소개됐다. 어떤 의상은 옷만 봐도 영화 속 장면과 인물 표정까지 생생히 되살아난다. 정민화 정책기획팀장은 “그동안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의상을 통해 많은 분과 영화에 대한 기억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영화 자료의 기증·보존 중요성도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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