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 찾아가고 백허그까지.. 오빠들의 아슬아슬 팬서비스

권승준 기자 입력 2021. 1. 23. 03:07 수정 2021. 1. 2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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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남자 아이돌도 '성 상품화' 논란

“압박이 심합니다. 느끼해도 꾹 참고 윙크 한번 날려줘야 앨범 한 장이라도 더 팔 수 있어요.”

2015년 데뷔해 4년간 남성 아이돌그룹 활동을 했던 이명성(가명·26)씨는 “남자 아이돌은 그야말로 영업 사원이라고 보면 된다”며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아이돌그룹은 중소 기획사 소속으로 2015년 데뷔한 아이돌그룹 60팀 중 하나였다. 아이콘(YG엔터테인먼트), 세븐틴(플레디스) 등과 같은 해 데뷔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앨범 2~3장을 내고 행사와 팬미팅을 전전하다 작년 초 활동을 접었다. 활동 기간 지상파 연말 시상식 무대에 한 번도 초청받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얻지 못한 비운의 팀이었지만, 그래도 매년 500~1000석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할 정도의 팬덤은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그게 모두 나와 멤버들이 필사적으로 팬을 모은 성과”라며 “같은 팀 멤버 팔짱 끼고 뽀뽀도 했을 만큼 팬서비스라면 안 해본 게 없다”고 했다.

최근 일부 남성 아이돌 팬이 가수들을 소재로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묘사하는 소설을 쓰고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행동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글도 올라왔다. 이런 류의 소설을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동성애 소설)’라고 하는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알페스가 남자아이돌을 소재로 한다. 이 때문에 알페스가 남성을 성(性) 상품화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대로 아이돌그룹과 소속사가 인기를 얻으려 가수들의 성 상품화도 불사하는 탓에 알페스 같은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러스트=안병현

호텔 객실 찾아가서 팬서비스를?

“아티스트는 상품이 아닙니다. 행사 참석을 취소해 주세요.”

2019년 12월 남성 아이돌그룹 ‘업텐션’의 소속사 정문에 일부 팬이 만든 대자보가 수십 개 붙었다. 업텐션 멤버들이 저녁 시간에 일본인 여성 팬들이 머무는 호텔 객실을 방문해 함께 사진을 찍고 짧게 이야기 나누는 이벤트를 여는 걸 반대하는 시위였다. 팬들은 “소속 가수를 배려하지 않는 저급한 이벤트이며 가수의 인권침해”라며 비판했다. 소속사는 “가수들과 충분히 협의해 진행하는 행사”라고 해명했지만,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결국 취소했다. 업텐션 팬이라는 이진희(22)씨는 “여자 혼자 있는 객실을 찾아가는 것 자체도 이상한 데다 방 안에서 과도한 스킨십을 요구하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며 “아무리 팬서비스라지만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해 반대했다”고 말했다.

호텔 행사를 기획한 게 업텐션이 처음은 아니다. 몇몇 남성아이돌 그룹은 여행사나 호텔과 계약을 맺고 팬서비스란 명분으로 수년째 이런 이벤트를 열고 있다. 호텔 객실뿐 아니다. 앨범을 구매한 팬들만을 대상으로 한 팬사인회에서 가수가 팬서비스라는 명분으로 뺨에 키스하며 셀카를 찍거나 온몸을 밀착하고 뒤에서 포옹하는 등 수위 높은 스킨십을 해주는 일이 잦다. 방탄소년단 같은 최정상급 아이돌그룹도 팬사인회에 온 팬들에게 간접 키스를 해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각종 스킨십을 해주는 모습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이런 이벤트는 동경하는 가수와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참가 경쟁도 치열하다. 통상 사인회는 앨범에 든 추첨권을 응모해 당첨되면 참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같은 앨범을 수십~수백 장씩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명성씨는 “팬사인회는 그동안 갈고 닦은 애교를 총동원할 기회”라며 “사인회에서 팬들에게 얼마나 성의 있게 팬서비스를 하느냐로 인기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이돌 팬덤 사이에선 가수가 하는 애교나 스킨십 등 이른바 ‘팬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통칭해 ‘창짓’(팬서비스를 뜻하는 은어)이라고 한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나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에서 ‘창짓’을 검색하면 수천 건의 글이 올라온다. “이는 손으로 입술 훔치는 모양새를 보니 색기가 보통이 아니다” “△△는 저렇게 뒤에서 허리 감는 걸 누구한테 배웠냐” 등 여성 팬들이 남성 아이돌의 팬서비스를 평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앨범 100만 장 팔아달라는 아이돌

“안 친한 멤버라도 ‘커플링’(팬들이 특정 멤버끼리 짝지우는 것)이 되면 콘서트에서 백허그라도 하라고 시킵니다.”

아이돌그룹 두 팀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중소 연예기획사 대표 김모(43)씨는 “아이돌은 철저히 팬덤의 요구를 파악하고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팬들이 쓴 알페스를 보고 거기 나온 멤버들끼리만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시키는 식으로 반응해줘야 그들도 따른다”고 했다. 팬들 요구에 일부러 남자 아이돌끼리 친한 척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일이 잦다 보니 K팝 업계에선 ‘비즈니스 게이 퍼포먼스(비게퍼)’라고 비아냥대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아이돌 가수들도 팬들이 쓴 알페스나 각종 게시물을 면밀히 모니터링한다. 팬들이 올린 알페스에 직접 댓글을 달기도 한다. 팬들이 요구해온 애교를 TV 나 콘서트에서 그대로 해주는 가수들도 많다. 이 역시 공짜(?)는 아니다. 예컨대 가수들은 “지상파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하면 팬들을 초대해 한강고수부지에서 데이트를 하겠다”는 식으로 공약을 내건다. 이에 호응한 팬덤은 조직적으로 시청자 투표를 해서 자신들의 가수를 1위로 만든다. 최근에는 “앨범 100만 장 판매를 달성하면 팬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식으로 팬들에게 구체적인 수치까지 지정해주는 가수들도 나오는 실정이다.

실패하면 빚만 남는 아이돌

“실패하면 수억 원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라 가수도 소속사도 필사적이죠.”

남자 아이돌이 이렇게 영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아이돌을 중심으로 재편된 대중음악 산업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이 깊다. K팝 붐을 타고 수많은 기획사가 아이돌 제작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매년 거세지고 있다. 한 해 평균 아이돌 그룹 40~50팀이 데뷔하지만 그중 인기를 얻는 팀은 극소수. 아이돌 수준이 높아지면서 제작 비용도 치솟아, 실패할 때 받을 타격도 커지는 셈이다.

매년 회계 보고서에 ‘신인개발비’를 공개하는 JYP 엔터테인먼트를 기준으로 보면 대략의 비용을 추산할 수 있다. 2019년 JYP는 신인개발비로 9억2000만원가량 썼다고 공시했다. 연습생 규모가 20명가량인 걸 감안하면 1인당 연간 4500만원이 드는 셈이다. 연습 기간은 3~4년 정도. 3곡 정도 들어간 앨범 한 장 제작하는 데 드는 돈이 2억~3억원이고, 안무 창작이나 의상비, 미용실 등 부대 비용을 감안하면 6인조 그룹 하나 데뷔시키는 데 10억원 넘게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성공하면 몇십, 몇백 배의 보상이 따르지만 실패하면 제작자는 물론 가수도 빚더미에 앉는다. 가수나 그 가족이 제작비를 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나 SM, JYP 같은 대형 기획사 소속 가수들은 TV 예능 출연이나 자체 유튜브 방송 제작 등 든든한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돈도 인력도 부족한 중소 기획사는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수가 직접 팬들을 상대로 영업 전선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아이돌 전문 웹진 ‘아이돌로지’ 편집장 미묘씨는 “K팝으로 대표되는 대중음악 산업은 본질적으로 ‘성 상품화' 문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며 “다만 여성아이돌과 달리 남성아이돌 팬들은 가수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소수고,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팬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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