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주먹 활짝 펴서 품어라.. 모순을, 상극을, 부조리를

입력 2021. 1. 23. 03:05 수정 2021. 1. 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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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 이어령 쓰고 김병종 그린 눈물 한 방울]
그림=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김병종: 독자들 요청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병상에서 쓰신 작품들을 연재해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드리게 된 것이지요.

이어령: 염치가 아니라 멋쩍은 일이네요. 이중과세에 이중 인터뷰(웃음). 건강만 하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요.

김: 그런데 막상 선생님이 작품을 공개해 주신다 해도 얼마만큼 이해할지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20대 문청(文靑) 시절 외우다시피 한 선생님 글 하나를 준비해 왔어요.

이: 습자(서예) 시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잘 썼든 못 썼든 한번 쓴 글자에 개칠하지 마라(웃음).

김: 개칠하자는 게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분노의 주먹을 쥐었다가도 자기 가슴만 치는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로 시작해 ‘생명과 자유를 짓밟는 자들에겐 창끝 같은 투쟁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 주는 종의 언어가 될 것이다’로 끝나지요. 50년 전 문학사상지의 창간사로 쓰신 ‘이들을 위하여’라는 글입니다. 기억나시지요?

김병종이 대화 중 즉흥 필로 그린 이어령 초상.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을 쓰던 젊은 날의 이미지로 그렸다.

이: 그럼요. 분노의 시대, 암울했던 내 젊은 날에 주먹 움켜쥐고 쓴 글인데요.

김: 바로 그걸 묻고 싶습니다. 그때 그 ‘분노의 주먹’이 지금 병상에서 쓰신 ‘눈물 한방울’의 단시로 옮겨오면 어떤 글이 될까요.

이: 그거 뻔하지요. 한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분노(憤怒)라는 말부터 달라지겠지요. 우리말로 ‘화난다’고 해야 ‘눈물 한 방울’과 맥이 통할 테니까요. 어렸을 때 가장 겁나던 말이 뭐였어요?

김: ’엄마 화났어.’ 그다음이, ‘맴매.’

이: 누구나 그랬지요. 그런데 ‘엄마 분노했어’라고 해봐요. 화가 아니라 웃음이 나오잖아.

김: ’분노의 주먹'을 ‘화난 주먹’으로 바꾸면 또 무엇이 떠오를까요.

이: 한국 특유의 ‘화풀이’ ‘화병’ ‘홧김에’란 말이 연상되지요.

김: 참 독특한 말이네요. 외국에도 그런 말이 있나요.

이: 사람 사는 세상 다 비슷하지만 한국말 ‘화풀이'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가족의 경우 부부싸움을 한 시어머니의 화풀이는 며느리로 향하고 구박받은 며느리의 화풀이는 애꿎은 아이에게로 떨어지지요. 쥐어박힌 아이는 분풀이로 강아지 배를 걷어차고요(웃음).

김: 배차기! 어렸을 때 참 많이 듣던 말이지요. 어른에게 꾸지람 듣고 화풀이를 다른 데다 하는 걸 배차기 한다고 했어요.

이: 그래요.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애매한 말이지만 ‘바가지 긁는다’는 말처럼 힘없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보이는 간접적인 저항 방식이었던 겁니다. 분풀이와 배차기의 먹이사슬은 우리 사회 병리의 하나였지요.

김: 어디 배차기라도 마음놓고 했나요. “바가지 긁냐”, “왜 멀쩡한 애 울리냐”. 눈치 빠른 어른들이 먼저 알고 눈을 흘겼으니 말입니다.

이: 이제는 바가지 긁는 소리도, 강아지의 ‘깨갱’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민주사회가 되었지요. 화난 주먹 풀 데가 없어져 상대적으로 화병은 더 늘었고요. 개화기 때 일본 사람은 민주주의란 말을 하극상이라고 번역했다는데(웃음), 분풀이의 주먹이 아래로 향하든 위로 향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어떤 세상이 와도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손바닥을 내밀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겐 주먹을 내미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김: 그러니 절대강자가 없는 세상에선 모두가 주먹 펴고 사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외의 결론이 나오네요.

이: 맞아요. 교회 가서 주먹 쥐고 기도하는 사람 보셨나요?(웃음)

김: 그럼 선생님 말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분노의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다 멍이 들고 안으로 화가 쌓여 화병이 나서야 되겠는가. 화난 주먹을 펴고 상대를 품어라. 그래야 업그레이드된 ‘이들을 위하여’가 탄생한다.

이: 곁가지 다 쳐낸 정답입니다. 하지만 어디 쉽게 주먹이 펴지겠습니까. 몽둥이 들고 데모를 해도 풀리지 않는 세상인데. 그래서 슬픔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실존을 주먹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공감하게 될 때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 고였던 눈물이 맺히면서 한 방울의 눈물이 피 묻고 땀 묻은 주먹 위에 떨어지게 되지요.

김: 그런데 그 주먹 편 손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 호주머니지요.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겁니다.

김: 그러면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실직자, 노숙자의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

이: 그렇죠. 그 눈물이 단순한 화풀이의 눈물, 체념의 눈물이라면 말입니다. 축 처진 어깻죽지는 날갯죽지가 되고 호주머니는 그것을 가두는 새장, 조롱(鳥籠)이 됩니다. 홧김에 휘두른 두 주먹은 유리창 몇 장 깨뜨리고 벌금이나 무는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젊은 친구들이 그런 순서로 무릎을 꿇어 왔어요.

김: 그 눈물이 일시적으로 화를 풀고 방류하는 눈물이 아니라면 사태는 반전된다는 거군요.

‘눈물 한방울’로 다시 만난 이어령과 김병종. ‘생명 그리고 동행’ 전 이후 7년 만이다. / 이태경 기자

이: ’한오백년'처럼 ‘한’을 ‘품’고 푹 삭인 눈물이라면 아침 이슬이 아니라 구슬처럼 맺혀 씨앗이 되고 알이 됩니다. 당연히 주먹을 편 두 손은 알을 품는 날개로 변하지요. ‘새장’에서 ‘둥지’로 변한 호주머니는 무숙자의 무기력을 무한한 생명력으로 감싸줍니다.

김: 조롱과 조롱(鳥籠), 이슬과 구슬, 무숙자·무기력·무한한 생명. 언어의 운율을 타고 펼쳐지는 이 현란한 언어의 시적 이미지를 보다 쉬운 이야기로 들려 주실 순 없는지요.

이: 마침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이탈리아의 한 남자가 아내와 싸운 뒤 화를 삭이기 위해 집을 나가 주야로 일주일 넘게 450km나 걸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 벌금을 무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죠. 그러자 소셜미디어에서는 홧김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걷기를 택한 그의 행동에 찬사가 쏟아졌다는 거예요. 심지어 그를 영웅으로 일컬으며 벌금 대신 상을 주고 신발도 새로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리를 절던 사회적 약자가 달리기로 그 분노를 참고 삭이며 미국을 횡단한 포레스트 검프, 영화 속의 영웅 말입니다.

김: 눈 깜짝할 사이에 호주머니는 새장에서 둥지로, 눈물은 이슬과 구슬에서 알로 진화했습니다. 두 주먹이 펴져 양 날개가 되는 변용 과정과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막말이 국경을 넘어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미담이 되어 돌아옵니다. 무엇보다 ‘풀다’와 ‘품다’의 받침 하나 차이로 극과 극의 다른 세상이 펼쳐지다니요. 아무래도 선생님의 창조적 상상력을 소리 없는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김 화백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세요. 유다의 배신을 단죄하는 장면인데, 예수님의 한 손은 살짝 주먹처럼 쥐고, 또 한 손은 활짝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어요. 가위바위보로 하자면 주먹과 보자기를 동시에 내민 셈이지요. 게임이 되겠어요?(웃음)

김: 한쪽으로는 꾸짖고 거부하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

이: 품어주십니다. 모순을, 부조리를, 그리고 상극하는 것들을요. 만약 하나님이 분노로 두 주먹을 쥐었다고 가정해 봐요.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신이 ‘분노하는 날’(dies irae)인 게지요.

김: 결국 품는 것의 이미지와 호주머니의 관계를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군요.

이: 맞아요. 호주머니 때문에 품는 이미지가 가능해져요. 품의 사전적인 뜻은 ‘두 팔을 벌려서 안을 때의 가슴’이라고 돼 있어요. 금시 우리가 안겨서 자란 어머니 품속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남자의 경우엔 그 품이 ‘호주머니’라는 겁니다. 어렸을 때 두 손이 얼면 호주머니에 넣고 녹이지요? 호주머니가 어머니를 대신해 손을 품어 따뜻하게 해줘요. 커서 고향을 떠난다는 건 어머니 품속을 떠난다는 것과 같은데 그때 호주머니가 남자를 품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김: 그러고 보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요. 그런데 한복에는 저고리에도 바지에도 호주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이: 기다렸던 질문입니다. 호주머니는 호(胡)의 주머니로 호빵·호박처럼 오랑캐 땅에서 들어온 개화기 서양 문명의 하나죠. 본고장에서도 모험가나 개척자인 남성, 고향을 멀리한 외로운 개인이 등장한 근대 이후의 발명품이라 했지요. 밖에 나가 활동하려면 요긴한 물건들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니까요. 철학자 데리다의 해체 이론을 빌리자면 호주머니는 밖에서 깊숙이 안으로 들어온 신체의 일부, 그러니까 ‘남자의 자궁’인 셈입니다.

김: 호주머니가 새 둥지가 되는 시적 이미지에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개념까지 겹치니 따라오기 숨이 찬데,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이야기로 풀어주시지요

이: 그러면 소설 소인국에 표류한 걸리버의 호주머니는 어떤가요? 여러 개의 호주머니에서 시계와 칼, 권총 같은 소지품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안호주머니에 숨겨둔 망원경도 있지요. 요즘은 그 광경을 공항 검색대에서 볼 수 있지요. 휴대폰, 여권, 지갑과 수첩. 그것들이 없으면 머리 깎인 삼손처럼 남자들은 힘을 잃어요. 텅 비어 척 늘어진 호주머니의 주름처럼 남성의 공허와 우수를 나타내는 것도 없거든요. 남자는 어느 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가. 하루의 노동이 끝날 때, 길이 막힐 때, 뭔가를 기다릴 때, 고향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을 볼 때. 호주머니가 둥지가 되면 허전한 그 손은 날개에서 품개가 되는 것이지요.

김: 조선일보 100주년을 기념한 타임캡슐에 넣은 선생님의 20년 뒤 메시지 ‘날개에서 품개’에 도달하게 되었군요.

이: 날다에서 ‘날개’란 말이 나왔으니 비를 막을 땐 날개가 덮개가 되고 알을 품을 땐 품개가 되는 것이고요. 화풀이의 순간적 행동은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일을 저질러요. 그렇다고 뭔가 화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한국인 전체가 화병을 앓게 되지요. 그래서 딱 두 방울도 아닌 눈물 한 방울로 화를 씻고 풀고 그것을 가슴에 품어 삭입니다. 술독에서 술이 익듯이, 암탉이 알을 품듯이, 임부가 태아를 품고, 산이 들판을 품고, 하늘이 산을 품듯이요. 날개가 품개가 되면 천둥 번개 치던 분노가 천천히 내면으로 배어 삭아 내리면서 새 생명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겁니다.

김: ’둥지 속의 날개'는 50년 전 선생께서 신문에 연재한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품어오신 말이네요.

이: 대지가 품고 있는 씨앗은 천년 뒤에도 꽃을 피운다고 했지요. 내 둥지는 기껏 품어봤자 50년도 안 된걸요.

김: 그러면 ‘이들을 위하여’의 결론인 ‘불의 언어’, ‘종의 언어’도 달라져야 할 텐데요.

이: 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선 쇠북 종(鐘) 자를 씨앗 종(種) 자로 고쳐야겠지요. ‘불의 언어’도 ‘물의 언어’로 달라져야 하고요. 종소리는 널리, 그리고 멀리 퍼져 나가지만 곧 사라지고, 불꽃은 활활 타오르다가도 저절로 꺼집니다. 하지만 씨앗은 아니죠. 천년 전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새로운 장치를 만들어 물을 주고 품어주면 꽃이 핍니다. 종소리의 확산을 응축한 것이 씨앗과 둥지의 언어이고, 눈물 한 방울의 언어인 게지요.

김: 지금 우리는 50년 전 ‘이들을 위하여’가 20년 뒤 ‘이들을 위하여’로 거듭 탄생하는 창조 과정을 배웠습니다. 종(鐘)이 종(種)이 되고 불의 언어가 물의 언어로 바뀌어 칠팔십 년의 그 방대한 생각들을 ‘눈물 한방울’의 다섯 글자로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 다섯 자를 단 한마디 말로 줄이신다면?

이: 옛날 ‘홍도야 우지 마라’를 한 마디로 줄이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었죠. 정답은 ‘뚝’. 그러면 제 대답은? 트랜스포머(TRANSFORMERS)!

호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던 스무살의 자화상

김병종 화가의 말

‘눈물 한 방울’을 한마디로 줄여 달라고 했더니 전광석화, ‘트랜스포머’란 말이 돌아왔다. 자유자재로 모양과 기능을 바꾸는 변신 로봇. 분노의 주먹을 날개로 품개로 변신시킨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변신 로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 그 눈물 한 방울을 그림으로 변신시킬지 걱정이다. 이때 침묵 속에서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도 풀고 품어버려요. 나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내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바로 내 트랜스포머, 눈물 한 방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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