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의 은퇴 7년 "그라운드 그립지 않아, 흥민이 보는 맛에 산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2021. 1.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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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김윤덕 기자의 사람人] '영원한 캡틴' 박지성.. 은퇴 후, 7년을 말하다

박지성과의 인터뷰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바야흐로 ‘손흥민 시대’이나, 박지성은 여전히 한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FIFA가 꼽은 수퍼히어로’였고, 만나기 어려운 스포츠 스타 첫손에 꼽혔다. 게다가 런던에 살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기회를 얻었다. 지난해 아이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다가 영국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봉쇄되면서 발이 묶인 박지성을 13일 경기 일산에서 만났다.

두 가지에 놀랐다. 잘생겨서, 그리고 터무니없이 겸손해서. “축구는 잘하고 싶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 같은 칭송이 따라붙지만 정작 그는 ‘박지성이 경기장에 나오면 안심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올해 마흔이 된 이 ‘바른생활맨’은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했고, 기자는 8분이나 늦었다.

은퇴 후 7년이 지났지만 마흔 살 박지성은 여전히 풋풋한 청년이었다. 그라운드가 그립지 않으냐고 묻자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럼 걔가 맨유에 갔겠지

–아, 미안합니다. 훈련할 때 이렇게 지각하면 기합을 받지요?

“기합은 아니고, 벌금을 냅니다(웃음).”

–한국에 꽤 오래 계시네요.

“영국에 신종 바이러스가 생겨 일정이 미뤄졌어요. 아이들 학교도 아직 문을 닫은 상태고. 다음 달쯤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은퇴 후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행정가 공부를 하셨죠? 해설위원도 하고, 간혹 예능 프로에도 나오던데요. 안정환 선수처럼 스포테이너에 도전할 생각은 없으신지.

“그건 재능과 역량을 타고나야 하는 거라서…. 전 그쪽은 아닌 것 같아요.”

–어느 축구 유튜브 채널에서 ‘그걔맨’으로 네티즌들을 빵 터지게 했던데요.

“방송은 편집의 힘이라(웃음). 실제는 하나도 안 웃겨요.”

‘그걔맨’은 축구 선수 조원희와의 일화다. 조원희가 “지성이 형은 일대일로는 나를 한 번도 못 뚫었다”고 허세 부린 얘기를 전해들은 박지성이 “그럼 걔가 맨유에 갔겠지”라고 해서 축구 팬들 사이에서 ‘그걔맨’이란 신조어가 유행했다.

–축구 해설은 이영표와 박지성 중 누가 더 잘합니까?

“영표 형이 잘하죠. 일단 오래 했잖아요. 저는 월드컵 한 번 한 거고.”

–해설은 적성에 맞던가요?

“저는 좋았는데, 안 좋은 평가가 많아서(웃음). 월드컵 현장을 선수가 아닌 관중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없이 본다는 게 정말 좋았죠.”

인터뷰 닷새 후인 18일, 박지성이 전북현대에 어드바이저로 합류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면서 말 그대로 조언하는 역할입니다. 맨유가 사활을 거는 유스 팀 운영 등 유럽의 선진적 시스템을 한국에 적용해 K리그와 유럽의 격차를 좁혀 나갈 생각입니다.”

◇한국 최초 프리미어리거?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손흥민 선수가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에서 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합니까. 단점이랄지.

“단점이라 부를 게 없어요. 이미 완성형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흥민이 박지성보다 축구를 잘합니까?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이런 선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뛰어나죠. 손흥민 같은 선수가 아시아에서 나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박지성도 현역 시절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시아 선수들이 유럽에 많이 진출하지 못했을 때니까요. 인식도 나빴고, 최상의 레벨을 보여주는 선수도 없었고요. 저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아시아 최고의 EPL 선수로 박지성이 아닌 손흥민이 뽑혀 섭섭하지 않았나요?

“전혀요.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나와야 했고, 그게 손흥민 선수라 기뻤어요. 흥민이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래도 손흥민이 이것만큼은 박지성을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하는 게 있다면?

“서로 포지션과 성향이 달라서 딱히….”

–월드컵 4강은 못 간다?

“하하하!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으로 뛰던 2010년 12월, 아스널을 상대로 골을 넣고 포효하는 박지성. /AFP 연합뉴스

◇포르투갈전 결승골? 들어갈 줄 알았다

박지성을 축구 스타로 만든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손흥민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고 당시를 추억한 손흥민은 “나는 박지성이 일궈낸 것을 따라가는 중”이라고 고백했다.

지금은 ‘레전드’로 불리지만, 박지성의 축구 인생이 화려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일기장에 ‘내 꿈은 축구 국가대표’라고 썼던 수원 세류초 5학년생은 안용중, 수원공고를 거치며 득점왕으로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어느 대학, 어느 구단에서도 원치 않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김희태 당시 명지대 감독이 박지성을 알아봤다. 명지대 축구부가 허정무가 이끌던 올림픽축구대표팀과 울산에서 연습 경기를 한 것이 운명을 바꿨다. 중앙선에서 볼을 잡은 박지성이 70m 드리블로 국가대표 5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허 감독이 그를 2000 시드니올림픽대표팀에 발탁했고, 2년 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월드컵 국가대표로 선발한다.

–박지성의 인생 경기는 무엇입니까.

“월드컵 포르투갈전이죠. 결승골을 넣었으니까.”

–이영표가 크로스 한 공을 가슴으로 받아 왼발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죠. 월드컵 역대 2400골 가운데 베스트 8골에 선정됐습니다. 들어갈 줄 알았나요?

“느낌은 왔죠. 잘 맞았다!”

–골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안긴 건 계획된 세리머니였나요?

“아뇨. 멀리 벤치에 계신 감독님이 보여서 그냥 달려간 겁니다(웃음).”

–폴란드전에서 첫 골을 넣은 황선홍은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가 안긴 것 때문에 히딩크가 황선홍을 네덜란드로 안 데려갔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런가요? 하하! 황 선배도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월드컵 첫 골을 넣고 무척 기뻤을 겁니다.”

◇슬럼프…공이 오는 게 무섭더라

–히딩크 따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으로 갔지만 큰 시련을 겪었죠?

“데뷔 직후 무릎 부상으로 경기를 제대로 못 뛰었어요. 저한테 공이 오면 홈 팬들이 야유를 보냈죠. 공이 오는 게 무섭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어요. 그때 처음 축구가 하기 싫었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선수가 답해야 할 공간은 경기장 뿐입니다. (부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보여준 게 아니니까 끝까지 가보자 했지요. 그걸 다 보여주고도 야유를 받는다면 그때 돌아가도 늦지 않다….”

–홈 팬들 극성에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은 원정 경기에만 뛰도록 배려했다고 하더군요.

“감독님 아니었다면 재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누구보다 제가 지닌 역량을 아시니 믿고 기다려주셨죠.”

박지성은 UEFA컵, 이탈리아 페루자와의 원정 경기에서 완벽하게 부활한다. ‘위송빠르크’라는 찬양 노래까지 생겼다. 네덜란드로 스카우트들이 몰려왔고, 2005년 7월 박지성은 유럽 최고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다.

–앨릭스 퍼거슨 감독이 직접 전화를 했다고요?

“그때만 해도 영어를 못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우린 네가 필요하다’ 정도?(웃음) 세계 최고 클럽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겨룬다고 생각하니 떨렸죠. 나의 끝이 어디인지 볼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라 여겼습니다.”

◇팀이 이기는 경기가 중요하다

‘여지껏 축구를 해봤지만 고달프고 힘이 든다. 오늘은 특히 힘들었다. 다른 사람도 참는데 내가 못 참으랴 하면서 끝까지 해냈다.’ ‘몸이 약해 사슴 피를 먹었다.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엄마와 아빠에게 보답하려면 축구로 성공을 해야 한다.’

세류초 5학년, 6학년 때 박지성이 쓴 일기다. ‘꿈의 구장’ 올드 트래퍼드에 입성해서도 그는 열세 살 소년처럼 치열했다. 폭발적 스피드의 호날두, 파워 넘치는 루니, 이타적 플레이로 헌신한 박지성의 조합은 맨유의 황금기를 견인했다.

–맨유 시절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 ‘지칠 줄 모르는 산소탱크' 등등. 슬럼프가 대부분 부상에서 왔을 텐데, 왜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뛰었습니까?

“그것이 나를 가장 가치 있게 만들고 다른 선수와의 차별점을 부여해준 무기였으니까요.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어요.”

–주니어 땐 공격수였는데, 호날두나 루니처럼 스트라이커로 승부를 걸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은 안 했나요.

“전혀요. 어떤 포지션이든 경기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수비수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 프리미어리그까지 진출한 거니까요.”

–'팀이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더군요. 골을 넣는데 소극적이라는 평가도 받았고요.

“골 잘 넣는 선수한테 패스하는 게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마다 경기장에서 살아남는 법이 다른데, 제가 만일 스트라이커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 돼 있을 겁니다. 스트라이커는 욕심도 많고 능력도 많아야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데,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웃음).”

–히딩크와 퍼거슨이라는 두 명장과 축구를 했습니다. 두 감독은 어떻게 같고 다른가요?

“둘 다 선수들과의 ‘밀당’이 뛰어나죠. 선수와의 소통, 동기 부여에 있어서 개개인의 성향에 딱 맞춘 리더십을 적용해 그 능력을 100% 발휘하게 합니다.”

–누구와 호흡이 더 잘 맞았습니까?

“같이 사는 사람은 아니라 호흡은 좀 그렇고(웃음). 전혀 다른 시기, 다른 관점으로 저를 키워주신 분들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저를 유럽 무대에 진출시켜준 분이라면, 퍼거슨 감독은 유럽 최상의 레벨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셨죠.”

–둘 다 덕장입니까?

“평소엔 따뜻하고 유머러스한데, 화낼 땐 엄청 무서워요.”

–그들처럼 명장이 되고 싶은가요?

“아니요. 명장들을 겪다 보니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는데, 저에겐 그런 덕목들이 부족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히딩크와 퍼거슨은 불같이 화를 내 그 선수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조차 전략이었어요. 저는 그걸 할 수 없어서, 특히 화내는 거요(웃음). 그래서 감독의 길은 아니다, 확신한 거죠.”

축구 해설위원에 가끔 예능프로에도 출연해온 박지성은 올해부터 K리그에도 본격 관여한다. 그는 "누굴 혼내지 못하는 성격이라 감독은 될 수 없다"며 활짝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아내 김민지 전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만두랑'. 박지성은 "아내는 내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내 덕에 그림 마니아가 된 그는 알렉스 카츠를 좋아한다고 했다. /'만두랑' 화면

◇나무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박지성은 2014년 SBS 아나운서였던 김민지와 결혼했다. 김 전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만두랑’엔 박지성 가족이 런던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라운드에서 포효하는 선수로만 박지성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한 여자의 남편, 두 아이의 아빠인 박지성의 모습은 신선한 감동이다.

–'만두랑'에서 아내가 말합니다. ‘아빠의 온몸이 아이들의 놀이터’라고.

“나무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해가 많이 비치면 그늘이 되어주고, 아이들이 필요로 하면 모든 걸 내어주는 아빠.”

–아이들이 아빠를 닮았습니까?

“연우(맏이)가 닮았죠. 정리정돈 좋아하고, 뭔가 제대로 준비돼야 일을 시작하는 성격.”

–김 전 아나운서는 어떤 아내입니까?

“제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 그림 전공한 아내 따라 미술관이란 곳도 처음 가봤습니다(웃음).”

–해외 생활을 오래 해 음식도 잘한다던데요. 아내도 인정하는 박지성 최고의 요리!

“입덧할 때 칼국수랑 김밥을 말아준 적 있어요. 맛있어서라기보단 고마워서 감동했을 겁니다(웃음).”

–그라운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요?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굳이….”

–은퇴 결단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내가 생각한 이상의 것을 축구 선수로서 경험했고, 더는 아프면서까지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은퇴 후 잔디 알레르기가 생겼다고요?

“눈이 간지럽고 재채기가 나서 검사를 받았더니 잔디 알레르기라고 해서 놀랐죠. 선수로 뛸 땐 없었거든요(웃음).”

–축구계 수도승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스캔들 한번 없었습니다.

“축구가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여서…. 해외에서 뛰다보니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술은 마시지만, 먹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웃음).”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입니까?

“터무니없이 긍정적이긴 하죠. 좀 실패해도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어리니까, 성장 중이니까라며 스스로 다독였어요.”

–어릴 땐 박남정 노래와 춤을 흉내낼 만큼 흥이 많았던 아이였다던데요.

“아주 어릴 때요(웃음). 축구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내성적인 아이가 됐습니다.”

–자서전에 보니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울지 않았다고 썼더군요.

“나쁜 생각은 떨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희망을 보지 않으면 좌절할 수밖에 없으니까. 유럽 선수들이 희한했던 게 경기에 지고도 분해하거나 울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농담하고 웃으면서 빨리 털어내려 노력하죠.”

–그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우리 20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다면.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지만 결국 빛을 발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만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죠.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믿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금수저 차두리? 부럽지 않았다

–박지성재단을 설립해 유소년 선수를 육성하고 있지요. 한국 축구의 미래, 어떻게 보십니까?

“유럽에선 돈 내고 축구하는 아이가 없어요. 한국에선 돈이 필요하죠. 그러다 보니 엘리트 교육에 초점이 맞춰지고요. 저는 유럽처럼 모든 아이들이 쉽게 축구를 배우면서 생활화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좋은 선수, 좋은 지도자가 나옵니다.”

–히딩크가 아니라 한국 감독이었다면 박지성은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들 합니다. 인맥, 학맥이라는 우리 축구의 병폐, 여전한가요?

“제가 국내에 있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히딩크 감독 이후 많이 변했을 겁니다. 계속 개선돼야 하고요.”

–히딩크가 선후배끼리 이름을 부르게 했더니, 당시 막내급이었던 송종국 선수가 대선배 황선홍을 ‘썬홍, 썬홍’ 부르다 미움받았단 얘기도 있습니다.

“혼난 건 아니고, 그냥 장난스럽게, 하하!”

–동갑내기 차두리 선수는 축구계 금수저였을 텐데, 부럽지 않았나요.

“전혀요. 두리는 두리대로 아버지(차범근)라는 큰 벽과 싸워야 했을 겁니다.”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를 하겠습니까?

“축구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웃음).”

–축구 선수가 안 됐으면 뭘 하고 있을까요?

“회사원? 조용히, 맡은 일 열심히 하는 회사원.”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온 국민에게 쏘아 올렸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우리 국민들께 위로의 한 말씀.

“우리는 닥쳐온 고난을 너무도 잘, 그리고 빠르게 극복해온 국민입니다. 이번에도 반드시 그럴 겁니다.”

박지성의 모든 답은 짧고 명쾌했다. 터무니없이 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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