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금만 먹고 튀었다? 출산율 1위 '해남의 기적' 끝난 이유

유종헌 기자 입력 2021. 1. 23. 03:02 수정 2021. 1. 2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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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제로섬 게임' 된 지자체 출산경쟁

‘해남의 기적.’ 한때 다른 지자체 공무원들이 전남 해남군의 출산 장려 정책을 이렇게 일컬었다. 얼마 전까지 해남은 ‘저출산 해결 모범 사례’로 불렸다. 2012년부터 7년간 전국 지자체 합계 출산율 1위. 2016년 보건복지부 ‘인구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전국 150여 지자체가 해남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그랬던 해남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발표된 2019년 합계 출산율에서 1.89명을 기록하며 전남 영광군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여전히 전국 평균(0.92명)보다 두 배가량 높지만, 2015년 출산율(2.46명)에 비하면 확연히 낮아졌다. 그사이 7만6194명이던 군 인구는 6만8806명으로 7000명 넘게 줄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하는 ‘인구소멸 위험 지역’ 중 하나가 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국 합계출산율과 해남군 출산율. /그래픽=양진경 기자

◇출산율 저하… 현금 지원 밀려서?

해남군의 출산율 증가는 대대적인 출산 지원 정책 도입 이후 일어났다. 해남군은 2008년 전국 최초로 출산장려팀을 신설했다. 2012년부터는 첫째 아이 300만원, 둘째 350만원, 셋째 600만원, 넷째 이상은 720만원 등 당시 기준 최고 수준의 출산 장려금을 지급했다. 처음 출산장려금을 도입한 2005년 1.44명이었던 출산율은 2015년 2.46명까지 올랐다.

현금성 지원을 앞세워 출산율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 경쟁자들이 따라붙었다. 인구 감소 속도가 빠른 경북 북부 지역이 대표적이다. 경북 영덕군이 2017년부터 첫째 아이에게 출산장려금 48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고, 봉화군은 2018년 첫째 아이 기준 전국 최고 금액인 700만원을 약속했다.

최근에는 셋째 아이를 낳으면 최대 1억원을 지원하겠다는 지자체까지 나왔다. 경남 창원시는 결혼하는 부부에게 1억원까지 ‘결혼드림론’을 지원하고, 10년 안에 셋째 아이를 낳으면 대출금 전액을 제해준다. 충북 제천시도 셋째 아이를 낳으면 주택자금 대출 5150만원을 대신 갚아준다.

2019년 해남군을 제치고 출산율 1위(2.54명)를 차지한 영광군의 비결도 ‘화끈한 지원’이었다. 영광군은 신혼부부에게 장려금 500만원을 준다. 첫째 아이 500만원, 둘째 1200만원, 셋째~다섯째 3000만원, 여섯째 이상에는 3500만원을 지급한다. 이외에도 신생아 양육비, 신혼부부 건강검진, 임신부 교통카드, 출산용품, 난임부부 시술비 등 각종 지원책을 마련하는 데 매년 45억원을 쓴다.

반면 해남의 출산장려금은 9년째 그대로다. 도입 당시만 해도 전남 22개 시군구 중 최고액이었지만, 지금은 중간으로 밀려났다. 같은 도내에 있는 광양시, 영광군, 진도군 등은 첫째 아이 기준 500만원을 주고 있다. 해남군 관계자는 “재정 여유가 있는 지자체만큼 장려금을 올리기는 어렵다”면서 “대신 출산 용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했다. 해남군의 재정자립도는 지난해 기준 7.4%로, 전국 군 단위 기초지자체 평균(17.3%)에 한참 못 미친다.

다른 지자체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동안 해남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급격히 줄고 있다. 2015년 해남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는 839명이었지만, 2019년에는 490명으로 4년 사이 42% 정도 줄었다.

◇장려금만 받고 떠나는 ‘먹튀’ 출산자

전국 지자체의 출산장려금 지급액은 매년 증가 추세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전국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지출한 출산지원금은 약 3822억원. 전년(약 2827억원) 대비 35%가량 올랐다.

늘어나는 출산 장려금과 반대로 대한민국의 합계 출산율은 매년 감소 추세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자체에서 주는 출산장려금은 출산 인구를 두고 인근 지자체와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에 불과해 국가 차원에선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출산장려금 정책이 국가 전체 출산율을 높이기보다는 인근 지역 인구를 뺏어온다는 얘기다.

지원금만 받고 지역을 떠나는 ‘먹튀’도 문제다. 전남도의회 우승희 의원에 따르면 2017년까지 5년 동안 전남 지역에서 출산장려금만 받고 떠난 ‘먹튀 출산자’는 1584명. 지자체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원금을 2~3년에 나눠 지급하고 있지만, 지원 기간이 끝난 뒤 이사하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해남군의 0세 인구는 797명이었지만, 6년이 지난 2019년 6세 아동 수는 426명이었다. 2013년 출생한 아이들 중 47% 정도가 6년 안에 해남군을 떠난 것이다.

육아정책연구소 양미선 연구위원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226개 지자체 출산 정책 담당 공무원 중 81.1%가 ‘현금지원사업 확대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현금 위주 사업의 효과가 낮거나 없고(69.6%), 지자체 간 과다 경쟁만 지속된다(66.0%)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지자체들의 과도한 현금성 지원 경쟁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재훈 교수는 “현금 지원은 중앙 정부에 맡기고, 지자체는 아이가 떠나지 않도록 지역 일자리 창출과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했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지자체별 출산장려금 통합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출산율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삼식 한양대 고령사회연구원장(정책학과 교수)은 “통계로 나오는 출산율은 산모 수가 적은 농촌 지역이 높게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들 지역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고 했다. 2019년 출산율 1위 영광군에서 태어난 아이는 570명이었다.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았을 뿐, 전체 군민 수는 매년 감소세다. 2020년 영광군 인구는 5만3099명으로 전년(5만3852명) 대비 700명 넘게 줄었다. 이 원장은 “무의미한 출산율 경쟁을 멈추고, 대신 체감 가능한 ‘살기 좋은 환경’ 조성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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