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들 '은밀한' 아동 학대, 강력한 처벌이 최선 예방책

2021. 1. 2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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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학대로 숨진 어린이 42명
가해자 대부분이 부모·친인척
약자에 표출되는 사피엔스 폭력
동물보다 더 잔인하고 무자비


러브에이징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입양 절차에 대한 관리·감독과 지원을 강화하라”

지난 4일 양부모 폭행으로 사망한 생후 16개월 ‘정인이 사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안타까움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과는 온도 차가 난다.

‘2019 아동학대 연차보고서(보건복지부)’만 보더라도 1년간 학대로 사망한 어린이는 42명. 이 중 45.2%는 정인이보다 어린 돌 전 아기들이다. 친부모 가정에서 22명이 목숨을 잃었고 모자 가정 6명, 미혼부·모 가정 5명, 사실혼 3명, 재혼 가정 2명, 부자 가정 1명, 입양 가정 1명, 기타 2명이다.

신고 건수는 사망자보다 천 배쯤 많은 4만1389건이며 가해자는 대부분 보호자(부모 75.6%, 대리양육자 16.6%, 친인척 4.4%)다. 학대 장소도 집(79.5%), 학교(7.6%), 어린이집(4.6%), 유치원(0.5%) 순이다. 아동학대가 태생적으로 ‘장기간’ ‘은밀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듯 정인이 사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1~2주마다 ‘늘’ 있는 아동학대 사망 범죄 중 하나며, 가해자가 주로 친부모라는 점에서 입양 절차를 개선한다고 발생을 줄이긴 어렵다.

사회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발생

흔히 심각한 아동학대가 알려지면 가해자를 언론에서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자라고 비난하고 시민들은 정신 나간 인간 취급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오해다. 사실 짐승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새끼를 장기간 학대하거나 죽이지 않는다. 또 심각한 아동학대 가해자도 대부분(90%)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소아청소년과 교과서에도 아동학대는 민족·지역·직업·교육수준·사회경제적 지위 등과 관계없이 발생하며 가해자는 주로 부모나 친척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따라서 진정성·실효성 있는 아동학대 예방책을 마련하려면 아동과 접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폭력적인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아동학대는 가해자의 내적인 공격성이 아동을 향해 표출된 폭력의 한 형태다. 대상이 아동인 이유는 가해자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제어할 수 있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밀림의 왕인 사자도, 용맹의 상징인 호랑이도 사냥감으로 튼실한 초식동물 대신 무리에서 이탈된 부상자, 엄마 잃은 새끼 등 약자를 선호한다. 성공 확률이 높아서다.

인간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죄수·포로·여자·어린이·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폭력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단 사피엔스의 폭력성은 동물보다 훨씬 잔인하고 집요한 측면이 있다. 영장류학자인 일본의 야마기와 주이치 박사는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동물은 식욕과 성욕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며 일단 욕망이 채워지면 상대방과 공존을 모색하는 반면, 인간은 폭력의 목표가 상대방 말살인 무자비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인종 청소’처럼 동족에 대한 대량 살상도 동물에서는 볼 수 없는 사피엔스 폭력의 특징이다.

인간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도 다양하다〈표 참조〉.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인 경우도 있고, 눈부신 태양에서 살해 동기를 찾는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본인도 잘 모르는 이유로 극단적인 폭력을 쓰기도 한다.

폭력 피해자가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동이나 장애인인 경우에는 객관적 증거를 찾아야 한다. 가해자들이 한결같이 거짓말로 학대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골절 형태, 화상 자국, 상처 부위, 뇌출혈 형태 등은 학대 여부를 알 수 있는 좋은 지표다. 참고로 성장기 어린이 체중 감소는 의학적 응급 상황이다. 정인이는 입양 당시 8㎏(8개월 여아 중간치)이던 몸무게가 생후 16개월(여아 평균 10.5㎏)에 7㎏이 됐다. 이 경우 체중은 1kg 준 게 아니라 10.5㎏에서 7㎏을 뺀 3.5㎏, 즉 예상 체중보다 3분의 1이 감소한 셈이다. 60㎏ 성인이 8개월 후 40㎏이 된 것과 같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치료해야

학대 발생 상황에서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조처는 피해자 보호와 치료다. 신체적 손상 뿐 아니라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편집증, 우울증, 폭력적 행동, 자살 위험 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폭력은 발생 전에 최대한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정신의학계는 폭력에 상응하는 처벌을 최선의 예방책으로 제시한다. 폭력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동기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연구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제시한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도 현대 사회에서는 사법제도가 폭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인이 사망을 계기로 정부·국회·법조계가 실효성 있는 아동학대 근절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해 보인다. 만일 지금의 노력으로 2021년부터 아동학대가 실질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면, 생후 16개월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정인이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칼럼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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