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흑인 공작과 결혼 목숨 건 상류사회..'브리저튼'의 파격과 한계

김지혜 2021. 1. 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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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시대극 로맨스는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배경이 병풍이 아닌 이상 시대적 맥락이 어느 정도 설명돼야 하고 그러다 보면 로맨스 본연의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온갖 종류의 로맨스물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수적 관점의 사랑 이야기가 젊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브리저튼'은 여타 시대극 로맨스물과 조금 달랐다.

'브리저튼'은 180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브리저튼 자작 가문 8남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국 소설가 줄리아 퀸의 '브리저튼' 시리즈 중 1권 '공작의 여인'(원제: The duke and I)을 원작으로 한다. 시즌1은 브리저튼 가의 넷째이자 장녀인 다프네(피비 디네버)와 사이먼(레지 장 페이지) 공작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영국 리젠시 시대(Regency era: 1811~1820)를 배경으로 한 할리퀸 로맨스물인 '브리저튼'은 종전 시대극의 공식을 살짝 비틀었다. 즉, 시대의 분위기를 품으면서도 현대적인 설정을 가미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 리젠시 시대의 파격 로맨스…'가십걸'도 있고 '그레이' 있고

'브리저튼'은 로맨스물 성공 공식의 답습으로 믿는 구석을 마련한 뒤 설정의 파격으로 뻔함과 고루함을 뒤엎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막장이며 잡탕이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작품들이 있다. 소설 '오만과 편견', 드라마 '가십걸',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다.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는 세 작품이 한꺼번에 언급되는 건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할리퀸 로맨스의 범주 안에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영국엔 윌리엄 셰익스피어만 있었던 건 아니다.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제인 오스틴도 있다. '브리저튼'은 제인 오스틴 문학의 영향권에 있는 드라마다. 할리퀸 로맨스의 시조급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作)과 동시대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앙숙이었던 남녀가 오해와 편견을 딛고 사랑에 빠진다는 주요한 플롯도 유사하다.

여기에 '가십걸' 구성과 유사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의 내레이터가 극 전반을 안내하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성애 묘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과감함도 엿보인다. 사이먼과 다프네가 결혼 후 대저택 실내외에서 벌이는 4분간의 섹스신 몽타주는 웬만한 19금 영화를 능가하는 수위를 자랑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킬러 콘텐츠들의 장점을 버무린 '브리저튼'의 시도는 노골적이지만 효과적이었다. 시대극과 만난 19금 로맨스는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세심한 구석도 돋보였다.

'브리저튼'은 사교계 소식을 전하는 휘슬다운의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가 안내된다. 오늘날로 치면 옐로우 저널의 연예 가십을 쓰는 기자로 볼 수 있는 휘슬다운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두고 미스터리적 요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할리퀸 로맨스 타깃은 명백히 여성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여성 관점의 심리묘사가 이뤄진다. '브리저튼' 역시 연애와 결혼을 앞둔 다프네의 설렘과 두려움을 세밀하게 그리고, 성(性)에 눈떠가는 여성으로서의 환희를 그리는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대상화되는 건 여성보다는 남성이다. '브리저튼'은 노골적으로 사이먼 공작의 매력을 전시한다. 부와 지위는 물론 수려한 외모에 완벽한 몸매까지 갖춘 사이먼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사랑과 결혼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나쁜 남자'인 척하는 다 갖춘 남자는 '츤데레' 매력까지 뽐낸다.

사이먼으로 분한 레지 장 페이지는 2020년 '남자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영국인 아버지와 짐바브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배우인 레지 장 페이지는 강렬한 매력으로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브리저튼'이 묘사하는 상류사회 풍속도는 세속적이다. 결혼이 곧 신분 상승(혹은 유지)의 도구이자 부의 세습을 위한 수단이었던 탓에 사교계에 데뷔한 모든 여성들은 결혼에 사활을 건다. 사교계에 데뷔한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예쁜 옷을 맞추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일뿐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둘째 엘로이즈(클라우디아 제시)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철딱서니로 비칠 뿐이다.

주요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묘사되는 당대 사교계의 풍경은 있는 그대로 보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여성의 지위와 자아를 다루는 시선은 후진적이다. '오만과 편견'이 문학이고, '브리저튼'이 연애 소설에 그친 결정적 차이일 것이다. 후자엔 통찰과 성찰이 없다.

'브리저튼'은 시대적 후진성을 풍자와 해학의 요소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청자들은 이 시대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조소하게 된다. 드라마 속 캐릭터에 열광할지언정 누구도 이 시대를 동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의도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옛날 옛적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드라마의 만듦새까지 낡은 것은 아니다. 상류사회를 재현한 총천연색 세트와 의상이 눈을 즐겁게 한다. 여기에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이리시, 아리아나 그란데의 히트곡을 현악기로 편곡한 OST는 참신하고 감각적이다.

◆ 흑인 공작은 무리한 PC?…파격과 무리수 사이

'브리저튼'에는 여느 시대극에서도 보지 못한 파격적인 설정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물론이고 출연진의 절반 이상이 아프리칸, 히스패닉, 아시안 등 유색인종 배우로 구성돼있다는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사이먼 공작은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미남으로 묘사돼있다.으레 독자들이 상상한 건 백인이었다. 제작진은 주인공의 인종을 바꿨다.

'브리저튼'이 처음 공개됐을 때 외신에서 가장 주목한 부문이 바로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Colour-blind casting: 배역을 캐스팅할 때 어떤 인종적인 피부색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캐스팅하는 것)이었다.

드라마의 책임 프로듀서인 숀다 라임스와 연출가인 크리스 반 두센은 '그레이 아나토미'로 호흡을 맞춘 콤비. 두 사람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인종 다양성을 고려한 캐스팅을 논의했다.

숀다 라임스는 드라마 '포 더 피플' 작업 당시 눈여겨봤던 레지 장 페이지에게 남자 주인공 사이먼 역할을 맡겼다. 몇몇 드라마에 조연급으로 얼굴을 비춘 적 있지만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다. 다프네 역은 오디션을 통해 피비 디네버를 캐스팅했다.

흑인 공작과 백인 여성의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브리저튼'은 캐스팅 조합만으로도 신선한 파격을 선사하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역사적 배경을 깔고 이야기를 펼치는 시대극에서 실재하지 않았던 설정을 가져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고증 무시'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브리저튼'은 시청자들을 설득시키는 일말의 장치를 마련했다. 조지 3세가 흑인 왕비와 결혼하면서 평등한 영국이 도래했다는 것. 그리하여 흑인 공작도 탄생할 수 있었다는 설정(이는 조지 3세의 아내였던 샬롯 왕비가 포르투갈계 혼혈이었다는 설에서 착안했다)을 깔았다. 드라마에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샬롯 여왕(골다 로쉐벨)도 등장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최근 몇 년 간 할리우드 내 이슈 중 하나는 PC(politically correct: 특정 집단을 차별, 배제, 주변화하지 않는 언어나 행동) 열풍이었다. 화이트 워싱(Whitewashing: 백인이 아닌 캐릭터에도 백색 인종 배우로 캐스팅하는 행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PC 열풍은 영화 캐스팅은 물론 아카데미 후보 지명 및 수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백인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고, 흘러가서도 안된다는 내부의 목소리는 콘텐츠 제작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고 현장 전반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물론 급작스럽게 분 변화의 바람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존재했다. '화이트 워싱'에 대한 반감이 무리한 PC를 초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비판 여론도 있다. '브리저튼'의 흑인 공작 설정은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 에 흑인 가수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됐을 때 일었던 논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현시대의 사회적 흐름을 투영하기 위해 역사의 왜곡이나 원작을 훼손하는 우를 범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브리저튼'의 캐스팅은 무리수보다는 영리한 파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과 출산이 여성들의 유일무이한 목표인 상류사회 이야기가 주는 공감이나 울림은 거의 없다. 다만 이 안에서 벌어지는 '동화같은 사랑'이라는 판타지에 취할 뿐이다. '브리저튼'은 휘발성 짙은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인종 다양성 요소를 넣음으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이로 인해 뻔하디 뻔한 로맨스물에 그칠 수 있었던 드라마는 캐스팅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의도한 논란처럼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22일 시즌2 제작 소식을 전하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편지가 공개됐다. 시즌2는 브리저튼 가의 장남 앤서니(조나단 베일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으로 알려졌다. 비호감 캐릭터였던 탓에 '왜 하필?'이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실망은 이르다.

'브리저튼' 시즌2는 2021년 상반기 촬영을 시작해 2022년 공개될 예정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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