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그리고 그 후, 소설 같은 실화의 여성 주인공들 [책과 삶]

배문규 기자 2021. 1. 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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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절박한 삶
전주람·곽상인 지음
글항아리 | 408쪽 | 1만9000원

“이수린 … 그 당시 장마철이라 강이 불어서 그런 상태에서 발을 헛디뎠단 말이에요. 그다음에는 물을 꼴딱꼴딱 먹거나 넘어지면 죽어요. 옷은 머리 위에 이고, 오징어, 마른오징어 머리에 이고. 내가 오징어를 좋아하거든요. 중국에 나가면 오징어가 비싸다는 생각에 내가 오징어를 달라고 했지(웃음).

전주람 지금 오징어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오징어를 이고 건너신 거예요?(한동안 같이 웃음)

이수린 그렇지! 오징어가 문제는 아니지. 옷 젖을까 팬티가 위로 오고, 교회도 안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무사히 강을 넘어와 구사일생으로 살았는데, 그때 내가 마음속에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 ‘그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걸 생각하면 죽을 수 없다’, 이 생각을 하니까 사람이 기운을 못 놓겠더라고요.”

탈북 여성 이수린씨(56·가명)는 1998년 중국으로 건너가 2006년 남한으로 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어코 오징어를 이고 강을 건넌 이야기를 읽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오징어는 어리석음보다는 치열한 생의 의지 같은 것일 터이다. 그는 2004년 탈북 도중 발각돼 14개월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온종일 ‘올방다리’(책상다리와 비슷한 자세)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수시로 감시를 받아야 했다. 환상과 환청을 겪을 만큼 혹독했던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얼음을 팔아 쌀을 넣어준 자식들의 정성이었다. 그는 그걸 또 더 불쌍한 사람에게 나눠주다가 ‘머저리’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운 좋게 남편과 딸 두 명까지 가족 모두가 탈북했다. 북한에선 탁아소 선생을 했지만, 남한에선 직업을 이어갈 수 없어 보험회사에 다닌다.

인터뷰 도중 이씨는 대뜸 나이를 묻기도 했다. 인터뷰어 전주람이 ‘36세’라고 답하자 말한다. ‘왜 뚱뚱하냐? 다이어트를 하라.’ 이 맥락 없는 답은 무엇일까. ‘젊은 사람이 부지런히 살 빼고, 게으름 떨지 말고 살라’는 뜻인가. 이야기는 다시 튀어 한국에 처음 온 탈북민을 도운 일로 이어진다. 어느 날 봉투를 빌리러 온 이웃집에 보험 하나를 들라고 했다면서 묻는다. ‘근데 상담사 선생님, 혹시 보험 든 것 있수?’ 인터뷰를 하러 온 건지 보험 판매를 하러 온 건지. 거침없던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전씨는 이씨의 임대아파트를 방문하게 된다. 누추한 풍경에 어쩔 줄 몰라 하다 마침 집에 있던 남편까지 소개받는다. 잠깐의 불편한 만남이 지나고 이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갑자기 펄쩍 뛰면서 ‘이번 달 보험왕이란다’ 하고 좋아했다. 어찌나 펄펄 뛰면서 얘기를 하던지, ‘남북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더니 말했다. ‘대한민국 참 감사한 나라죠. 노력한 만큼 돈도 벌 수 있고. 얼마나 좋습네까?’ ”

<절박한 삶>은 탈북 여성 5명의 생애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들이 도망쳐온 삶을 지탱하는 마음속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사진 속 얼어붙은 두만강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 강은 다 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수심과 강줄기’가 있다는 그들 얘기에서 삶과 죽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탈북 여성 다섯 명과의 인터뷰
연구자로 만났지만 진솔한 대화

<절박한 삶>은 다섯 명의 탈북 여성을 만나 그들의 삶을 묻는 인터뷰집이다. 인터뷰는 2014년 11~12월 이뤄졌고, 2016년 북한이탈여성의 심리사회적 자원을 분석하는 학술 논문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그 건조한 서술로 삶을 지탱한 힘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을까. 두 저자는 논문이 연구자들에게만 국한되어 활용되는 데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대중과 담론을 형성해서 이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책을 다시 썼다. 사람 대 사람으로 그들을 만나고, 날것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서다.

정말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인터뷰이들은 저마다 애달픈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무슨 비장한 투사나 고난을 이겨낸 동포로 그려지진 않는다. 때로는 무례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인터뷰어 역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이라기보다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서 편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들이 겹겹으로 쌓여가며 오늘 한국 사회를 그려낸다. ‘그들’로 구별짓기 했던 ‘우리’의 문제를 드러내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다.

백장원씨는 서울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바리스타로 일한다. 책 표지 인물도 그이다. 글항아리 제공
마른 오징어를 이고 강을 건너고
인신매매 당해 중국서 결혼하고
중국·캄보디아 거쳐 한국에 오고
북에 남은 아들에게 생활비 보내고

백장원씨(58·가명)는 탈북 도중 딸과 생이별해 지금도 생사를 모른다.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 노동단련대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남한에서 받은 신분증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에게 신분증은 자유와 안전의 상징이다. 원민형씨(42·가명)는 북한에서 여군으로 복무하다 스물네 살 때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는 브로커에게 인신매매를 당해 현지에서 결혼했고, 이름을 바꿔가며 살다 십수년 만에 남한 땅을 밟았다. 마현미씨(50·가명)는 남한으로 홀로 넘어와 10년 넘게 식당과 웨딩홀에서 일하다 몸이 상했다. 북한에 남겨둔 아들은 올 생각이 없다고 해 생활비만 부치고 있다. 김미숙씨(50세·가명)는 고향 친구에게 남한 소식을 듣고 중국과 캄보디아를 경유해 왔다. 북한에서 데려온 딸과 아침밥을 먹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저마다 애달픈 사연은 다르지만
생사 넘나들며 얻은 강인함은 같다
불뚝불뚝 드러나는 부조리·냉대…
절박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삶이
저자들의 연구 논문 밖으로 나와
날것의 목소리 그대로 전해진다

각자 다른 경험과 경로를 거쳤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생사를 넘나들며 얻은 강인함이다. 특히 여군 출신 원민형씨는 말 그대로 ‘센 언니’다. 군인 시절 180명 넘는 부하 대원이 있었다는 원씨는 중국에 있던 시절 메신저 프로필에 ‘쯔신더워’라는 말을 적어뒀다. 한국말로 하면 ‘자존심이 넘치는 나’라는 뜻이다. 그는 사랑 없이 만들어진 딸이 생기면서 ‘아내’이기를 포기하고 ‘엄마’를 선택했다.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이름을 바꿔가며 국경을 넘어온 그는 단단해지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가득했다.

원씨는 ‘무조건 되게끔’ 하는 사람이다. 하나원에서 장기자랑을 준비하면서는 ‘야, 이 썩을 새끼. 제대로 해라’ 발을 차면서 지휘를 하고, 힘들어서 눈물이 쏟아질 때도 ‘이 씨발, 이씨’ 막 이러면서 눈물을 닦았다고 말한다. 그는 무인도에 간다고 할 때 가져갈 물건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첫째로 종자를 가지고 가면 되고.” “그리고 최소한의 농쟁기?” “그리고 내 몸을 구할 수 있는 거. 선크림이라든가 스킨로션 뭐 그 정도로.” “그런데 우리 딸은 별로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 그냥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해. 내가 아플 때 돌봐주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네 번째고 일단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고 정도?” 그는 곧고 굳센 ‘참대’ 같은 사람이다. 그 속이 텅 비어서 여리고 외롭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들의 이야기에선 북한 사회의 부조리함과 탈북 과정의 어려움이 불뚝불뚝 드러난다. 하지만 <절박한 삶>이라는 것은 그저 북한의 삶이 비참하다는 차원은 아닌 것으로 읽힌다. 한국 사회의 냉대와 멸시 역시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부분부분을 모두 기워낸 것이 그들의 절박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삶이 된다.

인류학자 김현경의 추천사는 책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여기서 관객을 정면으로 향한 인터뷰이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저자의 옆모습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생계형 연구자의 고단한 현실을 토로하는 데서 시작해 탈북 여성들과의 첫 만남과 자신이 받은 문화적 충격을 아주 솔직하게 묘사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만한 이런 선택을 통해 저자는 인터뷰이 한 명 한 명을 소설의 주인공처럼 생생하게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에피소드들을 한데 묶은 옴니버스 영화처럼 볼 수도 있고, 단편을 이은 연작소설처럼 읽을 수도 있다. 책 마지막 연구노트에서는 쌉쌀한 여운이 남는다. 나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 사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전씨는 인터뷰에 응해준 북한이주여성 5명에게 감사 표시로 북촌을 데려간다. 책에 등장하는 원민형씨의 열 살 딸도 함께했다. 추억을 남기려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자 갑자기 아이는 강아지처럼 전봇대 뒤로 잽싸게 숨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신분을 감추며 숨어살았다는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전봇대 뒤로 숨은 아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 없이 사진을 찍었고, 그 아이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날 계속 경계했다.” 언덕을 내려와 인사동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차가 떨어질 때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채워줬다. 칭찬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 아이는 구경을 하러 나온 걸까. 엄마를 지켜주러 나온 걸까. 내 눈에 비친 아이는 후자였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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