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식생활서 약품·우주선까지.. 인류 일상 송두리째 바꾼 '냉장고'

오남석 기자 2021. 1. 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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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거 냉장고가 20세기 초 출시한 아이스박스형 냉장고. 푸른숲 제공
1934년 미국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제너럴 일렉트릭의 모니터 톱 냉장고 광고. 푸른숲 제공

■ 필요의 탄생│헬렌 피빗 지음│서종기 옮김│푸른숲

‘콜드체인’ 17세기부터 상품화

식품공학 역사상 최고의 혁신

플라스틱 생산·건축 활용 등

새로운 시장·문화·생활 창조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 가전제품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하나를 꼽는다면 뭘까. 가장 힘든 가사노동 중 하나인 빨래를 대신하는 세탁기, 설거지를 떠맡는 식기세척기, 음식 조리를 손쉽게 해준 전기밥솥과 오븐 등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영국 런던과학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헬렌 피빗은 신간 ‘필요의 탄생’에서 “우리 인류의 일상을 말 그대로 송두리째 바꾼” 주인공으로 냉장고를 지목한다. 짧게 보면 약 80년 전, 길게 봐도 150년 전쯤 등장한 ‘콜드 체인(cold chain·저온 유통 체계)’ 덕분에 인류의 음식 소비 습관은 물론 식생활, 요리법 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유에서다. 전체 인류 역사로 볼 때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식문화와 수요가 생겼다는 얘기다.

원제가 ‘냉장고 : 부엌 속 차가운 것의 이야기(Refrigerator : The story of cool in the kitchen)’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시선은 냉장고라는 기계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콜드 체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고, 냉장고라는 기계의 형태로 각 가정에까지 뿌리를 뻗어 전에 없던 새로운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속속들이 살핀다.

최근 약 300년 동안 열과 온도 연구에서 선봉을 도맡아 온 영국왕립학회는 지난 2012년 냉각 기술의 등장을 식품공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꼽았다. 콜드 체인 구축이라는 냉각 기술 발전의 역사에서 가정용 냉장고는 최종점이고 말단에 해당한다. 콜드 체인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가정용 냉장고 이전으로 거슬러 가야 하는 셈이다.

그리스와 로마, 중국 등 고대 문명에서도 얼음을 보관해뒀다가 음료를 차게 식히는 용도로 사용한 기록이 있지만 차가운 기운, 즉 냉기(冷氣)가 상품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봐야 17세기부터다. 왕족과 일부 귀족이 얼음 창고를 운영하면서 차가운 음식에 대한 기호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상류 사회에 퍼졌다.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1808년 친언니 커샌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음을 먹고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군색한 주머니 형편은 잊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미국 보스턴 출신으로 ‘얼음 왕’이라고도 불린 프레더릭 튜더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과 노르웨이에서 얼음을 수확해 주요 항구의 얼음 창고를 거쳐 세계 각지로 얼음을 실어 날랐다. 큰 상자에 얼음 덩어리와 함께 음식을 보관하는 ‘아이스박스’가 상류층 가정을 파고든 19세기 말 무더위로 발생한 ‘얼음 기근’ 현상은 천연 얼음 시대를 끝내고 인공 얼음 시대로 가는 계기가 됐다. 제빙기의 등장과 함께 냉장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20년대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냉매 압축기를 가정용 기기에 맞게 소형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가정용 냉장고의 시대, 즉 가전기기로서 냉장고의 시대가 본격화했다. 음식 재료를 신선하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을 넘어 차가운 음식(cool cookery)이라는 새로운 식문화가 생겼다. 비좁았던 주방이 이제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을 들일 수 있도록 확장되는 등 주택 설계에도 혁신이 이어졌다.

냉각 기술은 양조 작업과 플라스틱 생산, 페니실린 등 의약품 개발, 백신의 안전한 보관 등 비식품 산업에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 후버댐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930㎞에 달하는 냉각 파이프 덕분에 양생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을 낮출 수 있었다. 최근에는 D-웨이브 양자컴퓨터와 같은 최첨단 기기 발열 현상 제어, 힉스 입자를 발명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 실험 등 첨단기술 분야에도 활용된다.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적 발견과 응용 기술, 증기기관을 비롯한 각종 동력 공급 장치, 얼음 수확, 기후 변화와 새로운 시장의 발달, 새로운 먹거리와 요리법의 등장, 주택 문화의 변화, 식품 시장의 세계화, 공중보건 및 위생, 환경 파괴의 위험 등 냉장고와 관련된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넘나든다. 한 편의 파노라마 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시사점도 적지 않다.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꾼 냉각 기술이 한때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혁신 기술의 등장을 보다 열린 태도로 맞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352쪽, 1만98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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