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아동학대 회의 강화하겠다는 정부..'땜질처방' 우려

공지유 2021. 1. 2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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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서울 아동학대 신고수 3264건..심의 57건 불과
정부, 지자체 전문가 회의 강화 방안 부랴부랴 발표
"전문가 회의 매번 열리기 어려워"..실효성 지적
전문가들 "현장 전문성 높이고 자문 구조 개선해야"

[이데일리 공지유 기자] 정부가 ‘정인이 사건’ 이후 아동학대를 막기 위한 대응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실효성에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아동학대를 판단하는 ‘사례전문위원회’ 같은 기존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지자체 차원의 전문가 회의 개최만으로는 땜질식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같은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현장 전문성을 키우고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픽= 김정훈 기자)

학대 판단하는 ‘사례전문위’, 신고 수 3000건에 개최는 2% 불과

20일 이데일리가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별 아동학대 신고건수 △지역 아보전별 사례전문위원회 개최 횟수 및 심의 건수를 보면, 2019년 서울에서 신고된 아동학대 의심사례는 총 3264건에 달했지만 사례전문위원회를 진행한 사례는 57건에 불과했다.

사례전문위원회는 아동학대 의심 사례가 발생했을 때 이를 판단하고 개입 방향 등을 심의하기 위해 구성된 기구로, 법률·의료·아동분야 등 각계 전문가가 위원으로 참여하게 돼 있다.

또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사례전문위원회는 분기별 1회 이상 개최하도록 돼 있었지만 서울 9개 지역 아보전 중 2019년도에 서면을 포함한 회의를 4회 이상 개최한 곳은 단 두 곳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정인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강서아보전의 경우 2018년 아동학대 의심 신고건수가 406건이었지만 사례전문위원회 심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지난 2019년 감사원은 “아동학대 행위에 대한 개입 방향, 고발 여부 등을 심의할 사례전문위원회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보전의 판단 및 조치의 신뢰성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직후인 2019년에도 강서아보전에서 열린 사례전문위원회 심의는 단 한 건 뿐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기본 업무 외에 행사 준비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사례전문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지난해 8월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표한 ‘아동보호전문기관 업무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보전 직원들은 전문위원회를 열기까지 인력 소모가 심각하다는 의견을 냈다.

한 아보전 현장조사팀장은 “분기별 1회 이상 해야 한다고 돼 있다”면서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례는 많지만 위원회를 꾸리기에는 바쁘신 전문가들을 부르고 모으는 것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인이 사건’ 피의자 입양모에 대한 1차 공판기일을 사흘 앞둔 1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검 앞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이 근조화환을 설치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전문가 회의 강화’에 땜질처방 우려…“현장 전문성부터 키워야”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장조사가 공공으로 넘어가며 아보전 사례전문위원회마저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아동복지법이 개정되며 아보전 내 사례전문위원회 설치 규정이 삭제됐다. 이에 따라 아동학대 의심 사례 발생 시 각 시·군·구 지자체 아동학대 관련 부서장 및 직원들이 전문가 없이 자체 회의를 통해 사례 판단을 맡아왔다.

‘정인이 사건’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는 지난 19일 황급히 ‘아동학대 대응체계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방안에서 각 지자체에서 아동학대 사례에 대해 경찰·의사·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시·군·구 통합 사례회의’를 통해 학대 판단의 전문성을 재고하겠다고 밝혔다. 즉, 기존 사례전문위원회를 지자체 차원에서 진행하겠다는 셈이다.

결국 통합 사례회의 역시 분기별 개최횟수가 규정되지 않은 비 상시회의체여서 충분한 인력과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된다면 사례전문위원회와 같이 ‘땜질식 처방’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현장 전문가의 전문성을 늘리고 자문이 필요할 때 곧바로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유기적인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해당 사례가 학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회의를 매번 소집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복잡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에만 전문가들이 모여 결정하는 게 훨씬 실효성 있는 방안일 것”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이어 “전문가들이 모인 회의보다 중요한 건 현장에 있는 실무자들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라며 “교육뿐 아니라 정기적인 훈련으로 실천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결국 기존 사례전문위원회와 비슷해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며 “지역마다 전문가 인력 편차도 있고 전문가를 모으기 위한 예산도 많이 들어 구성에만 일 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교수는 “너무 무거운 (사례회의) 구조는 사실상 굴러가기가 힘들다”며 “현장 전문가들의 전문성을 높이고 본인들의 판단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이 됐을 때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해 온라인으로 신속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가 더 적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추진 방안은 지자체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 만들 예정”이라며 “최대한 쉽고 바로 회의가 열리고 의견이 교환될 수 있도록 자주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정인 양의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연합뉴스)


공지유 (noticed@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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