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휴대폰을 얼려버린 '동결사건'
LG전자가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바일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여기에는 매각이나 분리매각, 타 사업부로의 흡수통합 등 모든 가능성이 포함돼 있다.
2005년 전세계 1000만대 판매로 바람을 일으킨 초콜릿폰과 뒤이은 샤인폰, 프라다폰까지 승승장구하며 세계 3위 휴대폰 업체에까지 올랐던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이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실패의 원인을 찾아 미래 가능성을 열 수 있을까.
LG 휴대폰이 어려워진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에서 온 하나의 동결사건(Frozen Accident: 우연한 일이지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건)에서 시작됐다. 2006년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의 IMT 2000 사업권 반납이 그것이다.
3G 통신서비스 사업권의 반납과 단말기 업체의 경쟁력이 무슨 상관이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IMT 2000 사업권 반납 이후 벌어진 LG전자의 변화를 보면 이유가 짐작된다. '나비효과'의 진원지를 그 때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LG 모바일 사업의 정리 선언=권봉석 LG전자 사장은 지난 20일 MC사업본부 임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모바일 사업과 관련해 현재와 미래의 경쟁력을 냉정하게 판단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사업 운영 방향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떤 형태로든 고용은 유지한다고 선언해 내부 동요를 잠재우는데 힘을 썼지만, 매각이나 축소, 타 사업부로의 흡수 등은 기정사실화됐다.
IT 기업인 LG전자 입장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디바이스인 휴대폰 사업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겠다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다. 하지만 23분기 연속 적자행진을 이어오고 지난해 말까지 누적 영업적자가 5조 원에 달하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시점에 접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모바일 사업 조정은 LG가 1999년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뺏기면서 일부 반도체 설계 인력들을 흡수했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판매 수익성이 떨어지는 휴대폰 생산부문을 넘기고 통신 및 네트워크 기술과 핵심 소프트웨어·설계 기술 인력을 유지하는 형태의 재편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IMT 2000 사업권 반납이 가져온 나비효과=한 때 세계 3위까지 올랐던 LG의 휴대폰 사업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LG 내부에서도 의아해한다.
결정적 동결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출발했다. 당시 IMT 2000 사업권을 획득했던 LG텔레콤이 통신 시장의 3G 기술변화에 따라 동기식 방식의 사업을 이어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 사업권을 반납하려하자, 정부가 대표이사 퇴임 카드를 꺼내면서부터다. 경직된 정부의 규제가 LG 변화에 한몫했다.
당시 전기통신사업 제6조2 임원결격사유에는 '기간통신사업자가 정통부장관이 허가한 사업권의 허가 취소처분을 받을 경우, 해당 법인의 대표이사와 관계임원은 당연 퇴직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로 인해 잘 있던 남용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 사장이 2006년 7월 임기 중간에 급작스럽게 퇴임하게 됐다.(일각에서 교체시기였다는 분석도 있다.) 6개월 정도 LG 그룹 전략담당으로 있던 그가 2007년 1월부터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변화가 일었다.
LG텔레콤 대표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났으나 다음 해에 김쌍수 부회장의 뒤를 이어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영전하면서다.
나비효과는 △2006년 IMT-2000 사업권 반납→정통부의 사업허가권 취소→대표이사의 퇴임 조항→남용 LG텔레콤 대표이사 사장 사퇴(2016년 6월)→6개월 후 남용 LG전자 대표이사 취임(2007년 1월 취임 당시 애플 아이폰 출시)→맥킨지에 컨설팅 의뢰→마케팅 드리븐 컴퍼니(Marketing Driven Company) 선언→외국인 C레벨 대거 영입(9명 중 6인)→마케팅 강화, R&D 비중 상대적 축소→스마트폰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기존 피처폰의 성공에 심취해 스마트폰으로의 변화를 무시한 '휴브리스(hubris: 과거 성공의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파멸에 이르게 되는 영웅의 특성)'의 모습으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기술변혁기에 전략수립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는 특정 CEO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LG그룹 전체의 전략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기계공학→경제학으로의 변화…그 결과는=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창원 가전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형 엔지니어 출신인 김 부회장과 달리 경제학과 출신으로 수출업무와 해외지사,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경력을 쌓아간 남 부회장의 스타일은 달랐다.
남 부회장이 LG전자 CEO를 맡은 2007년 1월 미국에선 세상을 바꿔놓는 획기적인 발표가 있었다.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가 그 해 1월 9일 '맥월드 2007'에서 '1세대 아이폰'을 발표한 것이다. 전화와 문자메신저, 인터넷을 하나의 기기에 묶는다는 개념의 아이폰은 이후 휴대폰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놨다. 시장 점유율 40%에 육박했던 노키아를 한순간 침몰시키는 서곡이었다.
삼성전자는 아이폰 출현에 긴장해 전세계 IT 기업에서 매년 500명씩 채용해왔던 회사 내 S급 인재들 중 모바일과 소프트웨어 인재들을 급히 모아 애플의 전략을 분석하고 대응했다.
이때 LG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테크놀러지 기업에서 '마케팅 드리븐 컴퍼니'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초콜릿폰과 샤인폰, 프라다폰의 성공에 고무돼 기술은 어느 정도 단계에 올랐으니, 이를 잘 알리는 마케팅에 힘을 쏟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맥킨지 컨설팅의 결과였다.
마케팅 인력도 대거 늘리고, C레벨 9명 중 6명을 외국인으로 채용했다. CMO(마케팅), CPO(구매), CSCO(공급망관리), CGTMO(유통채널), CHO(인사), CSO(전략)가 모두 외국인 임원으로 채워졌다.
모든 회의는 영어로 진행하는 글로벌화(?)를 했고, 이때부터 회의에 들어가는 한국 임직원들은 언어의 장벽으로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대화가 힘드니 논의가 되지 않고 변화나 혁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당시 LG전자 임직원들의 얘기다. 뜻은 좋은데 현실에서 제대로 정착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애플이 스마트폰이라는 신개념의 제품을 내고, 세상의 변혁을 주도할 때 삼성은 급히 쫓아갔고, LG는 피처폰 3등에 취해 딴 길을 걸었다. 휴대폰 세계 1위 노키아가 걸었던 그 길이었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저서 '숫자로 경영하라 2'의 LG전자 편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모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마케팅에 치중하는 정책을 쓰면서 기술개발을 소홀히 하는 문제가 생겨 결국 스마트폰 발전을 따라가지 못해 2010년 후반기부터 어려움을 겪고 (2010년 9월) 남용 부회장도 물러났다."
◇마케팅 강화가 기술력 약화로 이어져=LG전자의 마케팅 드리븐 컴퍼니 전략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마케팅을 강화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투입되는 자원이 줄어들거나 경쟁력이 약화되서는 안된다.
문제는 당시 LG전자의 자원이 제한되다보니 마케팅에 힘을 실으면서 R&D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이 있었고, 그 결과 LG전자의 스마트폰 대응이 늦어졌다는 게 내부의 평가다.
휴대폰 투자의 경우 새로운 스마트폰보다는 기존 피처폰에 대한 투자에 더 신경을 썼고, 기술보다 마케팅에 더 힘을 쏟아 미래 투자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비의 비율에 잘 나타났다.
LG전자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비의 비중은 2006년 4.2%에서 2007년 6.6%(R&D 비용 1조 5518억원)로 늘었다가 마케팅을 강화한 시점인 2008년 6.3%, 2009년 6.2%로 소폭이지만 계속 줄었다.
9월에 남 부회장이 물러난 2010년은 7.36%(2010년 IFRS 회계기준 변경 환산시 4.45%: 2조 4800억원)로 늘긴 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을 놓쳤다는 평가다.
이에 비해 LG전자의 마케팅에 사용되는 광고선전비는 2006년 1조 1438억원에서 2007년 1조 2306억원으로 7.6% 늘었고,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선 이듬해인 2008년엔 1조 9249억원으로 56.4% 대폭 증가했다.
2009년엔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1조 5300억원, 2010년엔 1조 3400억원을 유지했다. 10년이 지난 2019년의 광고선전비가 1조 2084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상당한 비용을 마케팅에 지출했음을 알 수 있다.
반도체 부문이 포함돼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휴대폰 가전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같은 기간 매출액 대비 R&D 비중을 보면 2007년 9.4%, 2008년 9.5%, 2009년 8.1%, 2010년 9%(IFRS 회계기준 변경 환산시 6.1%: 9조 4109억원)였다.
상대적으로 열위였던 동부전자가 2007년 당시 R&D 비중이 7%인 것만 봐도 LG전자의 6%대 R&D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제품 판매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긴 했지만 기술의 변곡점이자 시장 변혁의 시기에 스마트폰 기술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하지 않고, 기존 피처폰을 알리는데 힘을 쏟은 후폭풍은 컸다. 23분기 연속 적자에 누적적자 5조원이 그 결과다.
익명을 요구한 IT 업계 전문가는 "2005년 초콜릿폰으로 LG전자가 이름을 알린 이후 후속 제품인 샤인폰과 프라다폰 등 피처폰이 대박을 이어가면서 '휴브리스'의 함정에 빠져 다가올 미래에 한 두발짝 뒤처진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LG전자에 또 한번의 기회가 올까=IT 업계 전문가들은 LG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인 시각은 이미 짜인 판에서 이를 흔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입을 모은다.
휴대폰 시장에선 크게 2가지 변혁기가 있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진화와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의 변화다. LG전자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진화에는 성공했으나, 스마트폰으로의 진화에 한발 늦었던 것이 뼈아픈 실기로 남아있다.
또 한번의 시장 변혁기가 온다면 그 기회를 이용해 퀀텀점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만 현재 구도로는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다.
IT업계에선 현재의 위기가 단지 LG전자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평가다. 기술적·수요측면에서 정체기에 접어든 스마트폰 시장 전체의 위기라는 것이다.
최근 언팩행사를 한 삼성전자 갤럭시 21에 대한 외신의 평가 중 "최고 혁신은 '가격을 200달러 낮춘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첨단 기술의 진화는 더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애플도 마찬가지다. 후발주자들이 치열하게 따라오는데 선두업체가 가는 길이 막다른 곳이라면 결국 따라잡힐 수밖에 없고 지금이 그런 상황이라는 얘기다.
LG전자가 최근 CES에서 선보인 롤러블폰이 '휴대폰 부활의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대해서도 업계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형성된 시장은 오랜 기간 주도권을 잡아온 애플, 삼성전자, 화웨이의 3파전인데 그 속에서 반짝 히트가 나오더라도 이를 지속시킬 수 있느냐는 미지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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