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유럽을 수놓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한겨레 2021. 1.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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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책&생각]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연재를 시작하며
14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지적 백가쟁명
페트라르카부터 피치노까지 르네상스 지성들 탐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향 피렌체 전경. 임병철 교수 제공

“만약 우리가 어떤 시대를 황금기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수많은 황금 지성을 배출하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다.”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자신의 시대를 이렇듯 자신만만하게 예찬했다. 불과 대략 한 세기 전 페트라르카가 암울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시대를 평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커다란 시대인식의 변화였다. 페트라르카와 피치노 사이의 100여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어떤 세계관의 변화가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이후의 역사에 어떤 의미 있는 영향을 끼쳤을까? 어쩌면 르네상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르네상스라는 말에서 마치 터널 끝 빛처럼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19세기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인을 “근대 유럽의 첫아이”로 규정한 이래, 별다른 고민 없이 무지몽매한 중세를 끝낸 계몽의 시대의 출발점으로 르네상스를 이해해온 탓이다. 그 결과, 물론 신화적 믿음에 더 가까울 테지만, 르네상스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단선적 진보로서의 역사의 도정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화려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이 매력에 이끌려, 르네상스를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영·정조 시대를 한국사의 르네상스기로 부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쇄신을 위한 모토로 르네상스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전면에 내걸기도 한다.

물론 임진·병자 양란 이후의 조선 사회를 부흥하려 했다는 점에서 또 침체된 무엇인가에 활력을 불어넣어 그것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에 나타난 르네상스는 이와 다른 개념이다. 무엇보다 역사상의 르네상스는 고전 모델을 전거 삼아 전개된 문화운동이었고, 그 점에서 정치적 혹은 문화적 슬로건으로서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르네상스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무엇을 생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가? 역사 속의 르네상스는 바로 이 질문과 함께 시작되고 발전했다.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그 본보기는 오래된 과거의 세계였다.

‘고전 고대’가 치유하리란 믿음에서 시작

어원상 ‘부활’이나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두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것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5세기 이후 알프스 이북의 유럽으로 확산된 일련의 문화적 변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를 정신적 지주 삼아 태동한 이 변화는, 앞선 중세문화를 배격하고 유럽인들의 정신적·문화적 삶 전반에서 고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되살리려 했던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흔히 페트라르카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암울한 문명이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학문의 퇴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역설적이게도 고대인들의 세계로 시선을 돌린 첫 인물이었다.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의 세계관이 시대의 폐해를 치유하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둘째, 르네상스는 이와 같은 문화적 변동이 일어났고 또 사회의 지배적 조류로 작용했던 역사상의 특정 시대를 일컫기도 한다. 르네상스 연구자들은 고전의 부활이라는 14~16세기의 문화적 풍토가 단지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등 당시 유럽의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야기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넓은 의미의 르네상스는 단순한 문화운동을 넘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역사상의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시대 개념이다. 르네상스는 고대라는 과거를 숭모하고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근대라는 미래로 발걸음을 내디딘 ‘역설의 문화운동’이자, 이를 토대로 전개된 역사상의 특정 시기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지적 쟁투는 화려했다

이 같은 르네상스의 두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르네상스가 옛 세계를 염원한 복고적·회고적 운동이었고, 따라서 그 아래에는 회한과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피치노의 자부심 넘친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과거를 향한 발걸음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했다는 점 역시 의미 있다. 아마도 서양 예술계를 빛낸 수많은 문화적 아이콘이 르네상스기에 등장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지구촌의 수많은 이들은 지금도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는 물론이고 그 외 여러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내뿜는 유혹에 이끌려 피렌체나 로마, 베네치아 등 소위 르네상스 도시로 발걸음으로 옮기고 있다. 르네상스는 이처럼 신이 부여한 천품을 자랑하던 수많은 창조적인 예술가들을 낳았고, 오늘날의 우리는 대개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르네상스를 바라보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 본질상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지식인들의 서가를 장식하고 있는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인사는 차치하더라도, ‘종이 전쟁’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수많은 지식인들이 명멸하며 지적 향연을 벌였다. 더욱이 통념과 달리 이 지적 경연에 동일한 고전 유산의 적통임을 자임하던 이슬람 세계 역시 동참하면서 그 깊이와 풍부함이 더해졌다. 어쩌면 지성인들의 열전으로 기술될 때 르네상스라는 역사의 이야기가 가장 올곧게 꾸며질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물론 그들이 언제나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은 아니다. 때론 숭고한 사상가였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논쟁적인 독설가였으며, 또 간혹은 성마른 논객이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를 이 다채로운 인간들이 수놓은 백가쟁명의 지적 쟁투기로 평가해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르네상스가 던지는 질문

르네상스에서 한편으로는 모순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무언가로 수렴될 수 있는 복잡다기한 사고 실험의 흔적들을 종종 목격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는 페트라르카부터 16세기 교양인의 전형 카스틸리오네에 이르는 르네상스의 지성을 읽으면서 앞으로 우리는 바로 그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를 찬란하게 수놓았던 지성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고, 어떤 세계를 꿈꾸었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생각했을까? 그들의 다양한 논의를 검토하며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갈 때에만 신화가 아닌 역사 속의 실체로 르네상스가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다.

그들의 여러 생각들은 자신들이 살던 사회에 대한 해석이요 대안이었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지향점이었다. 먼저 중세의 보편적·제국적 질서가 붕괴하면서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정치사상적 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오늘날의 공화주의 논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에 맞서 평화지향적인 군주제 담론도 더욱 정치하게 등장했다.

둘째, 문명적 위기의식이 팽배하면서 올바른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인간존재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 또한 제기되었다. 인간학적 혹은 지식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셋째, 일견 고답적이고 맹목적이던 과거에 대한 관심이 이른바 역사의식의 성장이라는 예기치 않은 변화 또한 일구어냈다. 과거에 대한 숭모와 탐닉이 역설적으로 시간의 변화와 시대의 차이를 깨닫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르네상스의 지성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낯선 세계를 그저 호고적 즐거움의 차원에서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나 학문에 대한 르네상스기의 여러 논의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와 권력 그리고 사상의 문제와도 분명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몬티 파이선’이라는 희극 그룹을 결성해 비틀스에 버금가는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테리 존스는, 자신의 중세에 대한 관심이 르네상스를 향한 세인들의 무비판적인 환호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신화화된 르네상스에 대한 의도적인 홀대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존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르네상스의 지성을 만나면서 그들이 표출했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존스가 혐오했듯이 그저 “오, 르네상스”라는 경탄 속에 박제된 르네상스가 아니라, 고대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다채로운 생각이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르네상스다.

임병철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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