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은 나눌 수 있다

한겨레 2021. 1. 22. 05: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책에서 보긴 봤지만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단어들이 있다.

그녀는 길을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인가? 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이렇다.

'최고로 어려운 모험을 같이 하자고 할 친구가 당신에겐 있는가?'라는 말을 책에서 읽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나 자신의 어떤 시절이 떠오른다.

처음엔 세 명이 걷기 시작했지만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의 한 장면처럼, 날이 갈수록 함께 걷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초상들: 존 버거의 예술가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김현우 옮김/열화당(2019)

책에서 보긴 봤지만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단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목숨 걸고’, ‘죽을 각오를 하고’가 그렇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 단어를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걷고 있는 한진중공업 35년 해고자 김진숙 지도위원도 그렇다. 그녀는 재발된 암 때문에 수술을 받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할 시점에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서는 마음은 결코 냉담할 수 없다. 그녀도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매각을 앞둔 한진중공업 동료 노동자들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길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의문이 든다. 그녀는 길을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인가? 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이렇다. ‘급한 치료부터 받고, 우선 살고 봐야… 몸을 따뜻하게 해야… 이제 좀 편히 삶을 즐기고….’ 그러나 김진숙에겐 아주 특별한 힘이 있었다. 그녀에겐 다짜고짜 “나랑 같이 갈래?”라고 물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황이라다. ‘최고로 어려운 모험을 같이 하자고 할 친구가 당신에겐 있는가?’라는 말을 책에서 읽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나 자신의 어떤 시절이 떠오른다. 당시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 김진숙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그녀 자신이 누군가의 그런 친구로 살아왔다.

김진숙은 길을 같이 나서기 전 황이라에게 바세린 한통과 발가락 양말 한 켤레를 사주었다. 첫날 세 사람이 길을 떠났다.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황이라의 표현에 따르면 눈알로 파고드는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만약 김진숙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도 근거가 있다. 처음엔 세 명이 걷기 시작했지만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처럼, 날이 갈수록 함께 걷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을 때는 70명이 함께 걸었다. 걸으러 갈 때 사람들은 묻곤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뭘 좋아하세요?” 그 질문은 묻는 사람들 자신을 먼저 행복하게 했다. ‘뭘 싸서 갈까?’ ‘뭘 나눠먹을까?’ 그 결과 그들이 가는 곳마다 환영하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음식이 있었다. 호박떡, 커피, 바나나, 사과, 우유, 호빵, 충무김밥 백인분, 어묵탕, 뜨거운 황태국. 길을 걸으면서 서로 안부를 묻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가 “배고파”라고 할 때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먹는 음식은 뭐든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음식을 먹은 그들은 쉴 때는 다음날 걸어갈 힘을 만들었다.

김진숙은 연대를 창조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줬다. 그렇게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훨씬 더 고단하고 외로웠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들을 만들고, 각자가 보낸 하루와 선택에 자부심과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진숙 그리고 그녀와 함께 걷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새로운 암흑시대에 고통을 나누는 것이 품위와 희망을 다시 발견하는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다. 많은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은 나눌 수 있다. 그 나누려는 의지에서 저항이 생겨난다.”(존 버거, <초상들>) 그리고 이것이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다.

(시비에스) 피디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